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영화 <네버 렛 미 고>를 보고
소설 <나를 보내지 마>는 잔잔한 호흡으로 시작된다. 전체 분량의 1/3을 지날 때까지 독자들은 이 소설을 기숙학교에서 생활하는 여느 10대 학생들의 성장 소설로 읽을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겠지만 짙게 배어있는 불안한 호흡에도 그저 작가의 수사적 개성이겠거니 여기며 말이다. 불길하던 암시와 실오라기 같이 이어지던 긴장의 끈이 풀어지며, 갑작스레 SF 호러 장르로 바뀌는 순간은 그래서 충격적이다. 기숙학교에서 생활하는 주인공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장기 적출을 위한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은 소설 중반에야 등장한다. SF 장르의 단골 주제인 복제 인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흔한 장르적 클리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작가의 역량 덕택일 것이다. 주인공들의 정체를 늦게 깨닫게 되는 첫 번째 이유다.
소설 속 세계에서 통용되는 단어 역시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작품 초반부터 계속해서 등장하는 단어들은, 복제 인간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것만으로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 캐시H의 직업은 '간병사'로 다른 '기증자'들이 여러 번의 기증 끝에 자신의 삶을 '완료(Complete, 영화에만 등장한다)'할 때까지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의적이고 모호한 단어들을 통해 사람들은 그 안에 숨겨진 내밀한 잔인함을 애써 감추려 든다. 아름답고 처연한 문체로 쓰인 10대의 성장소설이 실상 비극적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만큼 말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작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해외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주말 대낮, 광장에선 때마침 길거리 서커스 공연이 한창이었다. 나는 광장의 화려한 공연을 배경 삼아 두 명의 남성이 자연스레 키스를 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선 쉬이, 아니 전혀 보지 못했던 광경에 내심 놀란 마음을 감추며 찬찬히 거리를 관찰하며 느낀 점은 두 가지였다. 생각보다 동성커플이 많이 보인다는 것과 아무도 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차별은 일반인이 거니는 거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닐까. 절대다수의 일반인이 가지는 '일반성'이라는 권력은 '일반적이지 않다 판단되는' 수많은 이들을 거리에서 사라지게 한다. 출장에 동행한 과장 한 분께서는 한국보다 선진국인 독일에 이렇게나 휠체어가 많이 보인다는 사실에 못내 놀라워했다. 틀렸다. 장애인들에게 한국보다 독일이 더 자유로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 장애인이 적은 것이 아니라, 서울 거리에 휠체어가 적은 것일 뿐이다. '일상화된 차별' 탓이다. 차별은, 혐오는, 외면은 이런 방식으로 사회에서 약자를 소외한다. '그런 사람은 내 주변에 없는데'라는 강대한 문법은 거리에서 완성된다.
소설 <나를 보내지 마> 속 '평범한 인간'들은 복제 인간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기증자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위무하는 간병인을 기증자 중에서 뽑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 모습은 흡사 한센병 환자들을 '문둥병자'라 부르며 소록도에 격리하고, 환자들끼리 내부의 사회를 꾸리게 하던 우리의 과거와 닮아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이식용 장기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생기는 거라고, 진공실 같은 곳에서 배양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 했단다. (중략)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것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 <나를 보내지 마> 中
우리는 사실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가 지닌 알량한 양심을 두려워한다. 양심에 귀 기울이는 순간 자신의 삶이 불편해지는 것이 성가시면서도, 내심 두렵다. 마주하기 두려우니 심적 담요에 부담스러운 것을 덮는 데서 격리와 혐오는 시작된다. 주변에서 치우고, 근처에 오지 못하게 통제하고. 그럼에도 한사코 멀리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언어를 바꾼다. 중립적이고 모호한 용어로, 온전한 개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너희를 '학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지만,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단다. (중략) 이제 이 나라 어디에서도 헤일셤 같은 곳은 찾아볼 수 없단다. 이제 남은 건 정부가 운영하는 거대한 '사육장' 뿐이다." - <나를 보내지 마> 中
숨 가쁜 현실이 알량한 양심에게 발목 잡힐까 봐 노심초사한다는 건, 바꿔 말해 우리가 그만큼이나 자신의 양심을 신뢰한다는 뜻일 것이다. 정도 이상의 부당함을 각자의 양심이 직시하는 순간, 그것에서 쉬이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역설적이지만 강력한 확신 말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으니까, 그들이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감정을 이입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확고히 믿는 보편적 인권의 기초이자 모둠살이를 위한 최소한의 도덕 기반이 양심에 기인할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보내지 마>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서사는 특별하다. 전통적인 SF 클리셰에 흔히 등장할 법한 복제 인간들의 분노나 반항, 사회적 전복을 철저히 외면한 이 작품의 서사는 서정적인 체념으로 가득하다. 몇몇 평론들은 '부조리하고 잘못된 체제에 왜 그들이 묵묵히 참고만 있느냐'며 노여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작품 속에서 나와 닮은 그들을 발견한다. 순응하고 체념하는 것이 반복되어, 어느새 그런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마저 재빠르게 해버리는 주인공들의 답답함은 현실 속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으니 말이다. 거대한 메시지에 대한 SF팬다운 갈망은, 그렇기에 이 작품에는 가당치도 적절하지도 않다.
거대한 담론, 불의의 세상을 향한 격렬한 저항의 메시지는 때로 각각의 인간 군상의 삶을 매몰시켜 버린다.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들을 거대한 메시지의 수단으로 두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하듯, 찬찬히 복제 인간들의 삶을 조명할 뿐이다. 기숙학교 '헤일셤'은 그러한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배경인데, 복제 인간들에게 '학창 시절'이라는 추억과 '영혼'의 가능성, '성장'의 특별함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끝내 운명을 극복하지 못한다. 비극은 비극인 채 종결한다. 비극의 끝을 담담히 바라보며 주인공인 캐시H는 묻는다. '복제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냐'라고. 버거운 운명을 끌어안은 채 사라진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고도 매몰차게 저 질문에서 눈 돌릴 수 있겠냐고. 무수한 장벽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늘 저 질문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양심의 더듬이를 있는 힘껏 뻗는 수고를 들여야만 그들에게 가까스러 닿을 수 있다. 그런 노력이 없이는, 나는 저 질문에 떳떳하게 답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조금 전 당신은 상대의 생각을 읽지 못한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날 당신은 제 생각을 읽으셨어요.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신 건 그래서였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노래의 가사가 실제로 어떻든 간에 춤을 추면서 저는 제 식대로 해석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그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어떤 여자 이야기라고 상상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고 그래서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그 여자는 혹시 뭔가가 자신들을 떼어놓을까 봐 두려워서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고는, 베이비, 베이비, 네버 렛 미 고 하고 노래했던 거예요. 진짜 가사의 내용과는 달랐지만 당시에 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제 마음을 읽으셨기 때문에 그 장면이 그렇게 슬프게 여겨지셨을 거예요. 당시에는 그렇게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돌이켜 보니 좀 슬프네요." - <나를 보내지 마>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