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기획자 이야기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중요한 보고를 앞두고 있었다. 운 좋게도 능력 있고 열정적인 카운터파트들을 만나, 1년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싸워가며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고하는 자리. 기획자의 덕목이랄 게 여럿 있겠으나, 사람들과 부대껴가며 푸닥거린 떡고물들을 잘 주워 담아 경영층의 승인을 받는 것도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가 될 만한 게 많지는 않았다. 10월 중순이 경영층 보고일이라는 점 빼고 말이다. 단군 이래 최대 연휴를 보내면 경영층 보고라니! 시운은 야속하기만 했다.
덕택에 추석 연휴에도 며칠 회사로 나와-출근이라고 쓰고 싶지는 않다-보고서를 작성하며 지냈다. 연휴 2주 전부터는 이틀씩 두어 번을 회사에서 철야하기도 했다. 나는 올해로 3년 차로 접어든 대기업 기획자다. 기획 업무에 지원한 대다수의 20대 사원이 그러하듯 논리적인 결벽증이 있는 편이다. 풀어 말하자면, '프로젝트의 목적 - 목표 수요층 - 개발 컨셉 - 주요 개발 방향 - 상세 항목 - 예상되는 현안 - 그에 따른 대응방안 서너개 - 향후 계획 및 보고 시점'까지의 스토리라인이 한 큐에 꿰어져야 직성이 풀린다는 뜻이다. 그뿐이랴. 보고서 표지를 장식할 제목, 보고자와 피보고자의 직급, 의사결정에서 이 보고서가 쓰일 용도까지 신경써야 할 것들은 넘치게 많은 것이다.
이를 깔끔한 논리성의 그릇에 담아내겠다는 건, 깜냥도 안 되는 과한 욕심이 맞다. 세상의 그 어느 프로젝트가 깔끔하고 완결된 논리성을 지닐 수 있을까. 더러는 현실적인 제약으로, 몇몇은 기한과 수익성의 덫에 걸려, 혹자는 정치적 나비효과를 연유로 이래저래 논리적 흐름의 결락이 생기기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사분오열된 논리의 퍼즐을 한 데 모아 그럴싸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기획의 묘미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퍼즐을 맞추어 가는 과정은 많이 어렵고, 정말로 지독하게 고독하다.
최종 보고서를 쓰는 순간은 특히나 고독하다. 지금까지 많은 자료와 협의 결과를 도출해준 현업 실무 담당자들(디자이너, 엔지니어, 시장 전문가 등)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숫자와 도면으로 가득한 엔지니어링 데이터, 시장 데이터, 소비자 데이터, 가격 데이터, 공장 데이터 등등 스토리가 입혀지지 않은 날 것의 정보들은, 도리어 보고서를 쓰는 시점에는 양이 차고 넘쳐 중요치 않게 된다. 서 말이 넘는 가치중립적인 정보들 중에 스토리를 꿰어내는 과정은 홀로 할 수밖에 없다.
명함에 스페셜리스트라는 라벨이 붙은 이들 중 일부는 이 작업을 천시하기도 한다. 슈퍼 제너럴리스트를 꿈꾸는 학생들은 마냥 선망하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종이질'의 영역. 보고서를 읽는 대상과 그에 맞는 간결한 메시지를 담은 문장. 그 글귀 하나를 경영층 머릿 속 어딘가에 인셉션하기 위해, 기획자는 한정된 시간과 장수 안에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논리구조를 짜맞춘다. 좋게 표현하자면 그건 정보의 연금술일 것이다. 물론 정보의 염색, 탈색, 도열, 재배치, 선동, 중탕, 변형, 착시, 왜곡 등의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으리라.
철야와 연휴 출근이라는 산고 끝에 가져간 보고서 초안은 -그럴 것이라 거진 예상했지만- 팀장님 결재선에서부터 고꾸라진다. 앞서 말했듯이 보고서에 쓰인 논리라는 녀석은 늘 흠결이 산재하기 마련이기에, 기획자 나름의 논리와 가설로 포장한다손 쳐도 늘 한계에 부딪히기 일쑤다. 복잡하고 다양한 속성을 지닌 보고일수록 그 공동의 크기는 더 커진다. 하물며 1년간 고민한 프로젝트의 보고서였다. 기획자 개인이 얼마나 진지하게 고독한 싸움에 임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결재라인의 거인들에게는 슬쩍만 보여도 훈수둘 거리가 널렸으리라. 그렇게 애써 변명해본다.
당할 줄 알았기에, 팀장님의 훈수에는 늘 대항한다. 윗선의 수정 지시 중 받자와 모실 항목과 항변을 통해 잔류시켜야 할 항목들은 명확히 구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팀장님 결재후 다시 맞이하게 될 내일의 고독한 싸움을 위한 나름의 밑작업이다. 질 것을 뻔히 아는 방어전에 나서는 그 모습은 사뭇 비루한 연극처럼 보인다. 예정된 패배와 함께 숙제거리를 잔뜩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내 뒷모습을 향해 팀장님이 한 마디 한다.
"네 프로젝트는 큰 결함없이 추진되었고, 다른 프로젝트가 부러워할 장점도 많이 있다. 그걸 자랑하고 광을 팔아라. 그건 같이 애쓴 카운터파트들을 위한 예의이기도 하다."
SNS를 통해 내 자랑은 잘만 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보고서를 통한 자랑질은 힘겹기 그지없다. 앞뒤 재지 않고 당찬 캐치프라이즈는 버겁기도 하거니와 때로 공허하다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은연중에 자~알 자랑질을 해야만 한다. 또 얼마만큼의 산고를 수반할 것임이 분명했다. 보고 일자는 다가오므로 어떻게든 자랑질로 가득한 보고서를 만들어간다. 팀장님의 벽을 통과하고 그 윗선에 보고서를 들고 가니 '너무 자랑스럽게 쓴 것 아니냐'는 피드백이 따라온다. 알고 있었지롱. 보고선이라는 전장을 5개 정도 거치고 나면 나의 보고서는 무채색이 되어 버린다는 걸 말이다. 이런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웠나 한탄스러울 때도 있다. 무채색의 키메라가 되어버린 내 보고서는 기존의 의도대로 경영층의 마음을 인셉션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프로젝트와 보고서에서 애정을 거두기란 참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고슴도치 애정을 발판 삼아 보고서에 나름의 장난을 치곤 한다. 보고서 한 귀퉁이,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을 구석에 애초에 쓰고팠던 메시지 일부를 살짝 달아 놓는 것이다. 대세에는 영향이 없겠으나 눈치채면 이해할만한 나름의 복선들. 개발 도중에는 발견되지 않은 채 시판되어버린 프로그램 속 이스턴 에그처럼 말이다. 그건 내 소소한 복수일 수도, 몇 안 되는 일하는 즐거움 일지도 모르겠다. 종이질장이의 내공은 그렇게 아주 천천히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