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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Oct 25. 2017

'길들임'에서 '책임'으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토이스토리>, <매트릭스>, <메멘토>, 소설 <어린 왕자>, <드래곤 라자>에 대한 것도 조금.


"너희는 자신이 누군지 알기도 전부터 잃을까 두려워하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등장인물 '니앤더 월레스'는 자신이 창조한 레플리칸트Replicant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미 여러 번 생명을 창조한 그의 말투는 신과 흡사하다. 조물주는 창조물을 향해 자아의 본질은 두려움이라 말한 것이다. 자아의 출발점은 스스로가 누군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니앤더 월레스는 그 질문이 늘 두려움과 닿아있다고 말한 것이다. 

<Blade Runner 2049, 2017>

독일 민담에는 도플갱어Doppelgänger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마주하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의태하는 이 괴물은 악운의 전조로 여겨진다.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라는 독자성獨者性이야말로, 자신이 실존하고 싶다는 감각의 출발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자신과 닮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자아의 손실에 대한 공포를 낳는다. 도플갱어 민담은 이런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는데, 민담의 결말이 대개 도플갱어와 마주한 사람이 죽거나 미쳐버린다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How They Met Themselves>,  Dante Gabriel Rossetti


"나는 단수가 아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지구의 농원에서 수많은 장미를 마주하고 아연실색한다. 소행성 B612에서 장미는 단 한송이였다. 그토록 소중한 존재가 지구에서는 수많은 장미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왕자는 충격을 받는다. 그런 왕자에게 여우가 말한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이란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경험을 공유한 기억. 여우는 이를 '길들임'이라 표현한다. 수많은 장미 중 자신의 장미를 특별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길들임에 대해 배운 왕자는 다시 만난 지구의 장미들을 향해 당당히 외칠 수 있게 된다. 나의 장미와 너흰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그 꽃 한 송이가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 더 중요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유리 덮개로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야. 벌레를 잡아 준 것도 그 꽃이기 때문이야.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놓는 것도, 때로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도 귀 기울여 들어준 꽃이기 때문이지. 그건 내 장미꽃이기 때문이야."


영화 <토이스토리>의 '버즈 라이트이어'가 겪은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스스로를 실재하는 우주비행사라 여기지만, 사실은 비행사의 캐릭터를 공유하는 수많은 장난감 중 하나에 불과했다. 무수한 양산품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충격 속에서, 그가 자신을 다잡는 계기는 발바닥에 쓰인 앤디Andy의 이름이었다. 길들임의 문법은 그에게 '앤디의 버즈'로서의 독자성을 회복시킨다.

<Toy Story, 1995>

자신을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물로 여기는데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몰개성'에 대한 두려움은 늘 화두가 된다. 수많은 작품들은 몰개성의 공포에 대응하기 위해 저마다의 길들임을 소환한다. 소설 <드래곤라자>의 주인공 '후치 네드발'이 자신이 단수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유 역시 여기에 맞닿는다.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투영된 수많은 내 모습이 나의 개성을 이룬다는 통찰은, 단수가 아닐 때에야 스스로의 유니크함을 가지는 아이러니를 만든다. 그리고 그 관계의 근간에는 경험과 기억이 있다. 나 자신이 오롯하다는 물성이야말로 누군가와 함께한 경험의 공유와 그 기억으로 유지된다. 그랬어야 할 터였다.


기억이 덧씌워진 남자, 실제를 경험할 수 없는 여자

SF라는 장르의 매력은 무엇일까. 무수히 질문되고 답변된 테제Thesis를 향해, 상상력을 동원해 다시 한번 더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에 있지 않을까.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두 주인공 '케이'K와 '조이'JOi를 통해 관계에 대한 오랜 정답을 되새김질한다. 그 되새김질의 방식은 꽤나 지독하고 치열하다. 경험과 기억이 인간성의 근간이라면, 그 둘이 거짓된 존재들의 자아는 무엇으로 재단할 수 있냐고 묻는다.


경찰인 케이는 다른 레플리칸트들처럼 가짜 기억을 지니고 살아간다. 인간들은 그를 껍데기라고 박해하고, 레플리칸트들은 동족을 사냥하는 그를 백안시한다. 블레이드 러너인 그는 어느 쪽에도 다가가지 못한 채 영원한 타자他者로서 존재한다. 누구와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그의 유일한 쉼터는 맞춤형 AI인 조이이다.


조이는 케이의 집에 부착된 프로젝터를 통해 홀로그램으로만 구현되는 AI이다. 조이는 홀로그램 요리를 만들고 케이에게 책을 읽어달라 조르지만, 여전히 실제 요리와 책을 만질 수 없는 존재이다. 성과급을 받은 케이는 조이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휴대용 단말기를 선물한다. 조이가 처음으로 방에서 나와 비를 맞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손꼽히는 심미적인 장면이다. 내리는 빗물은 홀로그램인 조이를 그저 통과하지만, 조이는 금세 피부에 흐르는 빗물의 모습까지 홀로그램화한다. 조이가 비를 경험하는 이 과정은, 홀로그램이 세상을 경험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이는 세상의 경험을 흉내내어 가며 케이와의 추억을 쌓는다.

<Blade Runner 2049, 2017>

수사를 진행해 가며 케이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의 기억은 만들어진 기억이 아닌 실재하는 기억이었다. 조이는 케이가 특별한 존재라며 그에게 조Joe라는 이름을 선물한다.(케이는 KD6-3.7이라는 시리얼 넘버의 약자에 불과하다.) 실재하는 기억, 조이와의 추억, 그리고 선물 받은 이름. 기존의 문법대로라면 케이는 충분한 길들임을 탑재한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 그렇게 케이는 자신의 특별함을 은연중에 자랑스레 말한다. '인간이 4개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다면, 레플리칸트는 더 아름다운 2개의 코드(0과 1)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거짓말처럼 무너진다.


"오라클은 내가 '선택받은 이'가 아니라고 말했어요."

영화 후반부로 가며 케이의 길들임을 증명하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 조이는 케이를 구하려다 메모리가 파괴되어 죽고 만다. 케이의 기억은 실재하긴 했으나, 그가 경험하지 않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 덧씌워진 것에 불과했다. 그는 정말 중요한 존재의 더미Dummy에 불과했고, 여느 레플리칸트와 동일하게 제작된 노예였다.


상실감을 안고 마지막으로 월레스사로 향하는 케이에게, 홀로그램 광고 속 여인이 말을 건넨다. 조이 AI 제품의 광고. '케이의 조이'와 다르게 푸른 단발머리를 가진 광고 속 조이는 그녀의 범용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케이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고 속 조이는 케이를 향해 호객행위를 한다. "오늘 힘든 날이었죠? 내가 당신 곁에 있을게요. 조." 정말로 걱정스러운 말투로.

<Blade Runner 2049, 2017>


케이가 '자신의 조이'에게 선물 받은, 소중한 이름마저 그저 제품 내 프로그램에 귀속된 흔한 이름에 불과했다. 특별함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그 이름을 광고를 통해 듣는 그 장면은 잔인하고 아리다. 지금껏 케이를 인간답게 만들던, 길들임의 마지막 요소를 잃은 그 순간의 케이의 표정은 모호하다. 절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보이기도 하다. 경험도, 기억도, 이름마저도. 그의 몰개성을 가로막아줄 길들임의 근간은 텅 비어 버렸는데 말이다.

<Blade Runner 2049, 2017>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Neo가 자신이 선택받은 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표정이 그러했다. 빨간 약을 먹은 후 지금껏 살아온 앤더슨 씨Mr.Anderson로서의 삶도 버린 그에게 내려진 예언자 오라클의 판결은 잔인했으리라. 그가 모피어스를 구하기로 결심한 순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자신이 생각한 스스로의 특별함을 모조리 잃었을 때이다. 모든 특별함을 잃고 범용의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네오는 스스로 요원들을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받은 더 원The One, 즉 유일한 일자로 각성하게 되는 계기는 거기에 있다.

<Matrix, 1999>


"기억은 문신보다 더 불확실하지, 늘 불안전하거든."

소설 <어린 왕자>에서 많은 사람들은 '길들임'이라는 단어에 큰 감명을 받곤 한다. 하지만 여우의 충고 중에 눈에 잘 띄지는 않는 중요한 맥락이 하나 더 존재한다.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그것을 잊어선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넌 네 장미에 대한 책임이 있어."

관계는 단순한 길들임, 즉 노력하고 가꾼 시간과 경험만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소설 <어린 왕자>는 그 관계를 위해 스스로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에 더 큰 의의를 둔다. 어쩌면 다소 낯설고 신선한 '길들임'이라는 정의보다, 익숙하고 지겨운 '책임'이라는 단어가 더욱 버겁게 읽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어린 왕자는 홀로 남겨진 자신의 장미에 대한 책임을 지키기 위해 뱀에게 어려운 부탁을 한다. 먼 여행을 떠나기에 다소 무거운 몸을 지구에 맡겨두겠노라고. 그렇게 왕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미와의 관계를 완결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케이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조이의 광고로 인해 자신의 이름마저 특별하지 않음을 깨달은 후에도,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데커드를 구하고 그가 딸을 만나도록 돕는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라는 영화 속의 대사야말로, 그가 스스로의 독자성을 되찾기 위해 찾은 길이었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 셸비'는 뇌의 손상으로 10분마다 기억을 잃는 남자다. 기억의 휘발성을 보완하고자 그는 몸에 문신을 새기지만, 여전히 현실에 제대로 닻을 내리지 못한 채 기이하게 부유할 뿐이다. 그는 아내의 복수를 완수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방황한다. 전통적인 문법에 비추어 볼 때, 기억이 불안정한 그는 완결된 길들임을 얻는 데 끝내 실패할 뿐이다. 그런 레너드가 인간다움을 찾기 위해 한 행동은 방황의 연쇄를 끊기로 결정한 것이다.


연쇄의 고리 중 하나인 경찰 테디를 죽이기로 마음먹으며, 그의 차량번호를 문신에 새기는 레너드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 역시 인상적이다. 복수를 마친 경험, 그에 대한 기억은 그의 인간성에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없었다. 세상과의 관계를 스스로 완결 짓기 위한 결정을 마지막 장면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레너드의 기형적인 인간성을 설명한다.   

<Memento, 2000>


"그래도, 내가 결정할 거야."

타인과의 기억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길들임의 영역이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SF라는 장르적 특성을 무한히 활용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정의하기 위한 스스로의 결정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미 프로그램된 레플리칸트 중 하나가 아닌, 스스로 규정한 인간성을 획득한 존재.

소설 <어린 왕자>

케이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 전작의 레플리칸트 로이 베티가 죽을 때와 동일한 <Tears in the Rain>이 흐른다. 레플리칸트이면서 가장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전작의 로이처럼 영화는 케이의 인간성을 긍정한다.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처럼, 부서진 자신의 팔을 다시 붙이는 버즈처럼, 총알을 막기로 결심한 네오처럼, 마지막 문신을 새긴 레너드처럼. 모두 자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를 스스로 규정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선택한다.


보다 인간적이고자. 스스로 무엇을 인간적인지 고민하고 정의하면서 말이다.

만화 <소라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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