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읽고
영화 <인셉션> 초반부, 주인공 '코브'는 생각의 강력한 힘을 주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An "IDEA" is like a virus. Resilient, higly contagious. The smallest seed of an "IDEA" can grow. It can grow to define or destroy you.
"생각"은 마치 바이러스와 같아서, 매우 끈질기고 전염성이 강하죠. 아주 작은 "생각"도 마치 씨앗처럼 자라나 당신을 규정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어요."
2004년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오프'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지지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인지언어학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가난한 이들이 진보 정당(美 민주당)이 아닌 보수 정당(美 공화당)에 투표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부제: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는 사람들의 선택 대부분이 견고한 합리성보다는 사고 과정 기저에 자리 잡혀있는 프레임(Frame)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상대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는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모든 단어들이 그러하듯 '코끼리'라는 용어를 듣는 순간, 청자의 두뇌는 용어에 상응하는 생각의 틀(프레임, Frame)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마다 그 프레임의 형태는 상이하다. 어떤 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덤보'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큰 코와 엄니를 가진 회색의 동물. 아프리카 거주. 서커스와 연관도 높음'이라는 일련의 지식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프레임은 이렇게 개인의 경험에 따라 보완되고 수정되어, 견고한 자신만의 형태를 유지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레임을 부정하려면, 우선 그 프레임을 사용해야만 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이는, 코끼리를 연상한 후에야 이를 부정하기 위한 사고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떠올린 프레임을 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프레임의 효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미국 국민들의 그를 향한 사임 요구가 거세지자, 닉슨은 TV 연설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Well, I'm not a crock.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물론 TV 연설이 끝난 후, 미국의 많은 국민들이 그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기꾼'이라는 용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닉슨 개인에게 '사기꾼 프레임'을 덮어 씌웠기 때문이다. 상대편과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의 프레임으로 구성된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 여기서 등장한다.
사람들은 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프레임을 씨앗처럼 타인의 두뇌에 심을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프레임에 기반하여 손쉽게 사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레임 전쟁에서 특히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단어를 적절히 활용하면 뛰어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시절, 여당인 공화당은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를 언론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구제'라는 용어는 즉각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을 구해주는 구세주나 영웅'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 그 영웅을 방해하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악당일 것이라는 부차적인 연상도 가능해진다. '세금 구제' 법안이 실제로 빈곤층에게 세금을 더 과세하는 법안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세금 구제'라는 용어를 쓰는 순간, 상기한 프레임에 의해 유권자들은 그 법안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그에 반대한다면 - 높은 확률로 민주당 - 그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의 민주당 의원들까지 '세금 구제'라는 공화당의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민주당의 발등을 찍는 결과를 낳게 된다.
얼마 전 마무리된 대한민국 17대 대선에서도 재미난 해프닝이 있었다. 중앙선관위 주최 TV토론에서 국민의당 후보인 '안철수' 후보의 발언이었다.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향해 "제가 갑철수입니까?", "제가 MB 아바타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여 많은 이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아마 안철수 후보는 TV토론을 통해 자신을 향한 네거티브의 출처가 더불어민주당 혹은 그 지지자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닉슨의 사례와 유사하게도 그 날 안철수 후보의 발언은 '프레임 전쟁의 자학'과도 같았다. 해당 TV토론 일과 그다음 날까지 각종 포탈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권에 '갑철수'와 'MB아바타'가 점철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해당 사례는 실소를 머금을 정도로 프레임이 훤히 비쳐 보이는 사례였으나, 사실 대부분의 한국 정치환경에서 프레임은 은연중에 우리 주변에 침투해 있다.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약칭 '청탁금지법')은 보통 언론에서 '김영란법'이라고 불리고 있다. 코끼리, 사기꾼, MB아바타 등의 용어가 타인의 두뇌를 선점할 수 있는 프레임을 자극시킨다면, '김영란법'이라는 용어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떠올리게 할 수 없다.
이는 필리버스터의 원인이 되었던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이 실제 테러의 방지와는 연관이 적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철우 법'이라고 부르지 않고 '테러방지법'이라는 약칭을 사용하던 것과는 매우 대비된다. '청탁금지법'이나 '금품수수 금지법'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언론은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쓰기 어렵게 된다. 언론이 앞장서 이를 '김영란법'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들은 사람들이 이 단어에서 아무 프레임도 떠올리지 못하게 차단한다. 이런 걸 '음(-)의 프레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해당 법안에 대해 자유롭게 부정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언론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장황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프레임'이라는 용어와 뜻에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보다 프레임은 실생활 깊숙한 곳까지 정교한 방식으로 침투되어 있다. 오랜 시간 장시간 낮은 밀도로 노출된 메시지들은 청자 개개인에게 프레임을 형성시키고, 나아가 개인의 사고를 구성하는 기반 요소가 되어 버린다. 프레임의 위험성을 인지한다손 치더라도, 쉬이 빠져나오기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임의 위험성을 인지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관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