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수업>을 읽고.
나는 자존감이 부족하다.
왜 그럴까?
대학교 재학 시절의 나는,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휩싸인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 그리고 재수생까지의 나는 자신에 대한 고민은 잠시 덮어둔 채 입시 경쟁에만 매달렸다. 바라던 대학교에 들어와 자유롭게 학습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거치면서야, 비로소 늦게나마 스스로를 규정하는 뼈아픈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늦깎이 사춘기가 찾아왔다. 십수 년 남짓한 과거를 돌이켜 보며, 별안간 성찰 없이 살아온 자신에 대한 공허함과 상실감을 느꼈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오롯이 살고 있는 학우들을 보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낮게 판단하였다. 나만의 특별한 경험인 양 고백하지만, 어쩌면 여느 누군가의 20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 그런 재미없는 고백이다.
당시의 나를 돌이켜 보면, 걱정이 태산이었던 것 같다. 정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열렬히 고민했고, 수없이 질문했다. 10대를 입시공부로 단련해서일까, 내가 문제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책과 공부였다. 그리고 그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내가 경험한 유일한 성공방정식이기도 했다. 답 없는 고민 속에 파묻힌 채, 평생 인연이 없으리라 여겼던 문학책을 읽고 철학과 심리학의 문턱을 기웃거리던 좌충우돌의 시간들. 그때는 마침, 심리나 마음에 관련된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던 때였다. 바야흐로 '힐링'의 시대였다.
마음에 관해 쓰인 책들은 읽는 이에게 위안을 준다. 마음의 문제라는 건 늘 복잡하고 불명확한 면이 많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갈팡질팡하기 일쑤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들지언정, 정작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답답함. 그리고 그에서 파생되는 두려움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심리학 용어로 무장한 책들은 복잡한 마음의 단상을 명료한 단어로 진단한다. 이건 트라우마고, 이건 애정결핍이야. 이건 양가감정이로군. 학술적으로 정의된 단어는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가. 마치 미지의 맹수를 철창 속에 가두고서야 정체를 파악한 것 마냥 안도감을 느끼듯, 우리는 언어를 통해 마음속 미답지를 가두고 해체한다. 마침내 박제된 공포를 마주하고 나서야, 밑줄을 긋듯 두어 번 강조하며 소리 높여 외칠 수 있게 된다. 그래, 난 내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어!
책을 통해, 그간 수많은 석학들이 쌓아 올린 상아탑 어깨너머로 문제의 원인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대다수의 원인은 그 사람의 과거에 기인한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현재에 겪는 대다수의 문제는 과거로부터 시작되니까. 설령 지금의 내 자존감 낮음이 어릴 적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지언정, 과거를 고칠 수 없는데 무슨 상관이람. 내가 어릴 적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걸 알았더라도. 뭐, 그 사실을 다른 근사한 것으로 덧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문제의 정체를 깨달았음에도 손댈 수 없다는 사실은, 방황의 발걸음을 도돌이표 마냥 원점으로 회귀시킨다.
책은 말한다. 자존감은 자기애에서 온다고. 자기애가 뭔지 물으면, 자존감이 충만한 상태라고 답하기도 한다. 순환 참조의 굴레를 바라보다 비명을 지르고, 술에 취해 아무나에게 자기애에 대해 묻곤 했다. 뾰족한 소득 없이 술배만 늘던 어느 날, 내 고민에 대한 의외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새벽 세시, 친구가 넌지시 던진 주정 같던 답변 덕이었다.
너처럼 그렇게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자기애가 없을 리 없잖아?
지금의 그 친구는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할까. 삶에 정말 큰 용기가 되는 조언들이, 막상 발화자들에겐 별로 중요치 않은 지나가는 말인 경우가 왕왕 있다. 당시 그의 말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친구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기애란 녀석이 내 안에 이미 충분히 있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내가 몰랐을 뿐이라며 부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 단순하고 강력한 설득력에 수긍한 순간, 거짓말처럼 고민에서 해방할 수 있었다. 자기애를 이루는 최초의 벽돌, 자존감의 주춧돌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기에 쌓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저 정언명령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고, 이미 내가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의 한 구절 마냥 "빛이 있으라"는 말이 빛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돌이켜 당시에 읽었던 책들을 생각한다. 책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에만 탐닉했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헬스 책을 읽다 보면 내 신체의 문제를 진단할 수도, 근육과 혈관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력이 좋다면 그 본질까지 꿰뚫어 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몸을 가질 수는 없다. 이는 책에 대한 무용론이라기보다는, 과유불급에 대한 금언에 가까울 것이다. 여전히 나는 책이 없으면, 무엇이든 첫 발을 내딛지 못하는 서생일 뿐이니까.
역설적이지만 내가 책 <자존감 수업>에 대해 조그마한 신뢰감을 느끼는 이유는, 이 책이 그저 원론적인 '수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통해 얻은 것을 끊임없이 행동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저 문제를 용어로 정의 내리는 것에 천착하고 마는 수많은 심리학 교양 적에 대한 - 나의 설익고 건방진 - 피로감이 조금은 덜어진다.
하지만, 그런 차별화 포인트가 이 책을 회화를 강조하는 문법 서적, 혹은 운동 계획표가 포함되어 있는 헬스 이론 책과 같이 어색하게 보이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