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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Oct 05. 2017

학교에는 '나의 원죄'가 있다.

만화 <목소리의 형태>, 그리고 웹툰 <여중생A>

교실, 비정상을 향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 누가 학창 시절은 추억하며 아름답다고만 규정하는가. 기억 속의 학교는 꽤 잔인했기에, 나는 학창 시절의 아름다움만을 찬미하는 작품을 멀리하곤 한다.

 흔히 학교를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사회보다 배 이상의 잔인함을 지녔던 학교를 기억한다. 나는 '비정상'을 대하는 태도를 그곳에서 배웠다. 뚱뚱한 친구는 뚱뚱하다며, 키가 작은 친구는 키가 작다며, 가난한 친구는 가난하다며, 이름이 놀릴 만하면 이름 탓으로 얼마든지 한 사람을 모욕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다.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것도 함께. 그렇기에 나는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 아니라, 사회가 학교의 확장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며 '타인의 다름'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우리가 그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니까.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2011>

 학창 시절을 비극적으로 기억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모욕의 표적이 되는 것이 무작위적(Random)이라는 점이다. 교실 안에서 표적이 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이는 권력을 가진 극소수뿐이다. 그 밖의 어느 누구도 폭력이나 왕따의 대상이 될 위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누구나 비정상이라 할 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에. (다만, 그 정도의 차이는 있어서 그 위험은 확률로서 존재한다.)

 왕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안전한 몇몇 권력자들의 힘만으로 왕따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손가락질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가 동참할 때 희생자는 탄생한다. 그렇다. 희생자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면 사실 그건 랜덤이었으니까. '운이 정말로 나쁘지 않다면 올해 내가 표적이 되지 않겠군.' 이런 마음으로 이 시스템을 긍정한다.

 어쩌면 나는 최악의 학창 시절은 모면했을지 모른다. 작품 속 피해자의 모습에서 나의 과거가 떠오른 적은 많지 않다. 다만 그 최악에의 회피는 온전히 행운의 영역이었을 뿐, 어느 것 하나 내 통제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랜덤 한 시스템 속에서 교실 속의 필부필부들은 서로를 평가한다.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왕따를 한다'는 명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교실을 향한 내 기억은 이 정도로, 별로다.  


<목소리의 형태>, 원죄를 바라보다.

 학교 내 폭력이나 왕따가 만연한 만큼이나 그를 다룬 작품들 역시 넘칠 정도로 많다. 이런 주제를 다룬 수작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일본 만화 <목소리의 형태>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소소한 비극의 에피소드를 작품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수작이기에 이 작품은 잔인하고 불편하다.

만화 <목소리의 형태, 2013~2014>

 작품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청각 장애인이기에 왕따를 당하던 '쇼코'. 그리고 그 쇼코에게 악의적인 장난을 계속하다가 결국 본인이 왕따가 되어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쇼야'이다. 쇼코가 장애로 인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과 쇼야가 자신의 과거를 처절하게 반성하고 속죄하는 과정을 매력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특히 왕따의 가해자가 피해자로 바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를 높여가는 과정은 놀랍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유니크함은 왕따 사건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방관자 '우에노'와 '카와이'를 조명할 때 나타난다.

자기혐오를 폭력으로 풀어가는 우에노(왼쪽)와 지나친 자기애로 인해 위선적인 카와이(오른쪽)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시스템을 이용해 왕따를 방관하던 그 둘은 서로 상이한 태도를 취한다. 피해자를 마주한 채 피해자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화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하고야 마는 우에노, 어디서든 올바른 반장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위선을 택하는 카와이. 두 명의 모습은 대부분의 학교 내 문제 상황에서 방관자의 삶을 살아왔을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어린 시절 저지른 왕따라는 과오, 그 과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끌어안고 사는 두 고등학생의 모습은 미숙하다.

 사실 우리는 그 미숙함이 익숙하다. 무지를 동반한 미숙함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비웃도록 종용하곤 했다. 일산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이 자주 사용하는 욕 중에 '홀트'라는 단어가 있었다. 대치동에 전학한 후에 알게된 고등학교 친구들은 '밀알'이라는 욕을 사용했다. 각각 장애인 시설인 '홀트 일산 복지타운'과 '밀알 복지재단'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충격적이고 반성해야 할 일지만, 당시에는 어떠한 문제의식 없이 그 단어를 사용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언어를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며 자란 탓에, 지금의 나는 혐오를 껴안고 용인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2016년은 '병신년'이라며 친구들과 낄낄대고, '얼굴 몰아주기'를 즐거운 유희로 즐길 줄 아는 성숙한 어른 말이다.


그리고, 여중생A

 영화 실사화 소식을 접한 후, 웹툰 <여중생A>를 다시 찾아 읽는다. 주인공 '장미래'가 처한 학교에서의 상황은 <목소리의 형태>와는 사뭇 다르다. 학급 친구들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차별하진 않는다. 다만, 미래를 은연중에 무시하고 꺼릴 뿐이다. 그 이유에는 미래의 조용하고 암울한 성격도 한몫을 한다. 물론 미래의 그러한 성격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지만, 학급 친구들에게 그 근원적 원인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학교에서 정말로 악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백합도, 김유리도, 이태양도 그저 미숙한 아이들일뿐이다. 다들 자신들만의 무관심과 무지에 따라 소소한 잘못을 저지를 뿐.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면에 드러내기에 <여중생A>는 <목소리의 형태>와는 또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뚜렷한 잘못과 명백한 가해자가 있어 마음 놓고 욕할 수 있는, 또한 적극적으로 사죄하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이 있어 주제 의식이 뚜렷한 <목소리의 형태>에 비하면 <여중생A>는 훨씬 더 복잡하다. 즉, 현실적이다. 버거울 정도의 현실감 앞에서 독자들은 작중 누구에게도 시원하게 욕하지 못한 채 지쳐버린다. 그리고 독자들이 지치는 와중에 미래는 자살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자살을 지탱해주는 건 뉘우친 가해자도, 백마 탄 왕자도 아닌,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는 나유진이라는 한 학생이다.


웹툰 <여중생A, 2015~2017>

 이 작품이 멋진 이유는 그 빼어난 현실감 속에서 주인공의 내일을 희망차게 그려준 데에 있다. 물론 그 희망은 현실적으로 찾아 오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먼저 손을 내밀어준 같은 조 친구들, 재희와의 관계 등은 어찌 보면 그저 중첩된 우연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그 서사가 마음에 든다.

 대단하고 멋진 타인에 의해 구원받았다면 그건 너무 만화 같았으리라. 오롯이 미래 혼자의 힘으로 툴툴 털고 일어났더라면 화가 났으리라. <여중생A>는 구원에 대한 기대도, 스스로의 힘에 대한 찬미도 하지 않는다. 그저 우연히 의도하지 않고 내민 옆 사람의 손. 그 손을 미래가 잡기까지 넘어야 했던 순간순간의 관계에의 고민들. <여중생A>는 그 우연의 관계 맺음을 긍정한다.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 것이 랜덤이었다면, 구원에의 손길 역시 우연이어야 한다고. 어떤 이들은 그게 무슨 해결책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우연에 기인한 구원이 제대로 된 것이냐고. 틀린 지적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행운이 주어진다고 해서 누구나 늘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기회는 우연히 주어졌을 뿐, 그 기회를 붙잡고 희망을 발견한 건 미래 자신이니까.

 인간이 가진 복잡성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무리지은 모둠살이 안에서 더욱 심화된다. 선도, 악도 아닌 우리는 그렇기에 한순간에 가해자로, 방관자로, 피해자로도 변모할 수 있다. 다만 불행에 빠지는 것도, 행운의 기회도 그저 확률로만 존재한다면 나는 비극의 지뢰밭에서도 보다 의연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비정상이고 누군가가 정상이라서가 아니라, 다만 불행히도 나락에 빠진 것이라고 믿는다면. 대등한 인간이지만 다만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만 믿는다면. 우리는 유진이처럼 미래에게 손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더 자주, 더 많이.


 서른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인간관계를 배우고 있다. 20여 년을 함께 살아온 부모님과의 관계마저 아직 미숙한데, 학창 시절은 얼마나 서툴렀을까. 그때의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꽤나 단단한 외피를 두르고 있다. 그 당시 나를 힘들게 하던 것들을 지금 마주한다면, 비슷하게 힘들지언정 나 자신을 유지하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아마도 이런 외피가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물론 멋진 어른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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