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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Aug 20. 2017

내가 화를 내는 방법

짜릿함보다는 아늑한 관계를 찾아가는 도중.

내가 화를 내는 방법

 나는 기분 나쁜 일이 닥치더라도 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편이다. 대응하지 못한다는 건 그러니까, 전화를 받았는데 모르는 이가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을 때 즉각 욕을 못 했다거나, 식사 중 옆 사람이 내 셔츠에 김치 국물을 튀겼을 때 살포시 웃으며 빈정거리지 못하는 그런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응당 화날만한 상황을 겪더라도, 즉시 화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짜증이라면 조금 내겠지만 말이다.

Inside Out, 2015

 평소에 접하지 못한 난처한 일이 생겨서 감정이 상해버리면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둔 채), 나는 해당 사건을 마음속 작은 법정에 기소한다. 습관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이가 누군지 면밀히 검증해주세요."

 내가 느끼는 이 불편함이 내 오해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혹은 기억도 못한 채 내가 저지른 행동에서 기인한 것인지, 어쩌면 구조적으로 시기적으로 응당 이런 불편이 찾아오는 시기인 건지 등등. 조심스럽고 지난한 수많은 고민들은 어떻게든 내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으려는 나의 태도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방어적인 자기 검열. 끝끝내 내 귀책이 아닌 것이 확정이 된 후에야 나는 기분 좋게 상대방에게 화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와! 이 새끼 진짜 골 때리네!" 물론 묻지 마 반말 전화를 끊은 지 며칠이 지나고, 김칫 국물은 흔적도 보이지 않게 말끔히 세탁이 끝난 후의 일이다.


그에 대한 부작용

 세상 모든 것이 으레 그렇듯, 이러한 내 성격에도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글만 읽는다면 나는 화를 쉽게 내지 않는 멋진 사람! 하지만 사실 나는, 회사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나 화를 자주 내는 사람으로 통하지 않을까 못내 걱정된다. 

 사실은 이러하다. 특정 사건에 대해 화를 표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만, 마음속 재판정에서 홀로 항소에 상고에 판결까지 마치면 그 분노의 판결은 엄격한 판례집으로 기록되어 남는다. 이게 뭐가 문제냐면, 요즘은 모르는 번호 반말 전화만 왔다 치면 그 판례집만 믿고 즉각 화를 내는 것이다. "뭐 이 X발 놈이? 어따 대고 반말이야?" 

 가끔 곤란한 상황도 생긴다. '화내야 마땅한 일'로 규정된 사건이 터졌지만 실제로는 내가 화나지 않을 때가 그렇다. 너무도 경미한 나머지 감정이 상하진 않았지만,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판결문을 속독해버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외피는 상처받지 않았음에도 내부에서 저열한 분노가 차오르고 만다. 공대생은 연애도 코딩처럼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했던가. 즉각 화를 못 내는 것도, 상처받지 않았지만 프로토콜에 따라 기계적으로 성을 내는 것도 경우 없고 요령 없긴 매한가지다. 


통하는 사람

 소심하고 우유부단하게 근 30년을 살다 보니, 판례집 속에는 응당 싫어할 만한 사람이 가득해졌다. 보다 공정을 기해 말한다면, 최근에 쓰인 유죄 판결문대로라면 심지어 과거의 나도 상종 못할 사람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애초에 감정선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웃고 즐기고 때론 화내고 살면 좋았으련만. 이제는 편견의 성전은 나름 소중한 자산이라, 없애기엔 수지가 안 맞아 뭔가 아쉬워지는 것이다.

 20대 대학생 때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에 대해 알기 위해 애쓰곤 했다. 나와 맞지 않더라도 타산지석 삼아 무언갈 배우는 데서 미덕을 찾았더랬다. 이제 30대 직장인이 되어 이전보다 시간이 소중해지니,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다. 나와 통하는 사람 한둘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것이다.

 통하는 사람. 흔히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통한다고 한다. 좋아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 같은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향점이 같은 사람과의 대화는 얼마나 짜릿하고 몰입도가 높은가. 사실 매력이란 그런 데서 싹트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요즘의 나는 게을러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내가 원하는 건 짜릿함보다는 아늑함(Cozy)이다. 상대방이 내가 만든 '싫음 리스트'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드는 순간, 관계에 아늑함이 싹트곤 한다. 그렇다. 좋아하는 게 같은 것보다 싫어하는 게 같은 것이 훨씬 중요하다. 서핑하는 취미가 같아서 함께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전에, 같은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다. 내가 생각하는 몰상식과 당신이 생각하는 경우 없음이 동일하기를. 자잘한 취미야 서로 다양하다 하더라도, 내가 분노할 것에는 같이 욕해주기를. 그러면 우리의 관계는 한없이 Cozy 할 거야.


Don't look back in anger - OA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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