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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엘 Apr 26. 2016

불편함에 대하여

내 안의 잠재적 꼰대에게 보내는 글 (읽어라 이놈아)

 친구들 소식보다 좋아요 페이지가 더 많이 보이게 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내 이목을 집중시키는 게시글이 하나 있었다. 강사-아마도 서울대 출신인- 한 분이 자신이 가르치는 고등학생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도록 북돋아주는 글이었다. 명문대-서울대-와 비명문대의 삶을 예시로 들며 말이다. 그리고 그 글은 진심으로 날 불편하게 했다.  

 * 페이스북은 링크 공유가 어려워 구글링하여 공유


 나는 최근 들어 주변에서 불편한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변한 건 세상보다는 나일 것이다. 이제와 불편하다 느끼는 많은 것들 중 대부분이 예전에는 내가 앞장서 행동하거나 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과거의 나의 행동과 말도 불편해진 것이다. 위의 강사의 게시글을 소재 삼아, 과거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내가 무엇을 불편하게 인식하는지 나열해보고자 한다. 


#1. 오만함, 개인의 경험에 대한.

 가장 화나는 점은 강사의 태도다. 강사는 본인의 경험을 이렇게 서술한다.

  "나는 서울대를 다니며 많은 서울대 학생 친구를 사귀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중 지방대에 간 몇몇 친구들도 있으므로 그 둘과 비교해 보았더니 이렇더라. (중략) 서울대와 지방대는 이렇게 다르군."

  자신이 경험한 서울대 학생 일부를 전체 명문대생으로, 지방대학교 학생 일부를 전체 비 명문대으로 치환하는 언어의 마술은 실로 놀랍다. 오만하다. 그렇게 날 선 잣대로 평가하면, 어떤 이도 자유롭게 말을 하지 못한다고? 좋다. 한 발 양보해보자. 어쩌면 강사는 서울대생을 학창 시절 꽤나 많이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방대생은 그렇게 많이 경험했는가? 설령 백번 양보하여 서울대생과 지방대생을 같은 동수로 만났다고 할지언정, 그 지방대생이 더 많은 비 명문대생을 대표할 수 있는가? 강사의 개인 경험이라는 잘 난 잣대로?

 이렇게 생겨난 하나의 프레임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내 주변에 동성애자들은 그렇던데...' '내가 경험한 여자들은 그렇던데..' '내가 경험한 전라도 사람들은 그렇던데..'


#2. 결과와 원인의 혼동

 어쩌면 저 강사가 말한 대로, 서울대생과 지방대생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치자. 현재의 학벌주의 사회에서 학벌에 따른 기회 및 평가의 차별은 자연스레 일어나고 있다. 강사가 바라본 현상이 사실이더라도 그 원인은 사회에 일어나 있는 차별에서 기인한다. 그 결과로 서울대생이 좀 더 사회적으로 성공의 기회가 많아지고 그런 꿈을 잦게 꿀뿐이다. 이걸 "지방대생이 꿈이 작은 탓"이라고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추잡하다.


#3. 무심하기에 잔인한 일반화

 강사가 무심하게 나누어버린 흑백의 일반화도 문제다. 우선, 생각 없이 질러대는 일반화는 그것만으로도 옳지 않다. 그런데 그 일반화가 현실에 존재하는 권력 역학관계에 편승하는 방향이라면? 그건 단순히 현 체제를 공고히 유지하고자 하는 권력에 불과하다. 

 저 일반화가 얼마나 잔인하냐면, 저 글의 댓글에서부터 벌써 그렇다. 저 페북 포스팅에 대한 반박 댓글 중 지방대생이 쓴 댓글에는 무수히 잔인한 답글이 따라온다. '네가 언제 노력을 해봤느냐고. 무슨 불평이 그리도 심하냐고. 꿈이 작은 거 맞지 않냐고.'


#4. 그 와중에 자신감에 대한 비유는 '여성'

  사귈래 아님 말고..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걸 '큰 꿈'과 대비하는 비유는 정말 절망적으로 아재스럽다. 그들 머릿속에서 여성은 기득권이 되어서 누리게 되는 결과로써 존재한다. 그 오만 속에서 여성은, 기득권의 쟁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포상으로서의 대상이다. 

 저 비유에서처럼 "고학벌/남성"의 자신감에 반한 여성은 '된장녀'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5. 큰 꿈에 대한 정의도 사실 좀 불편하다. 

 저 앞에 #1,#2,#3이 다 맞다고 가정하자. 나아가 #4에 대한 내 불평이 너무 '오버'스러운 것이라고 치자. 현실이 그렇지, 한 번 해본 예시지.. 라며 현실론을 들먹이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현실적이면 그냥 '성공 가능성이 높으니까, 명문대에 가라'라고 말하지 그랬냐고. 그렇게 말하는 건 멋스럽지가 않다고 느끼는 건지, 왜 '큰 꿈을 꿀 수 있는 명문대, 꿈도 작은 지방대'로 프레임을 만드는지를 모르겠다.

 삼성 정도는 취업이 가능한 명문대생과, 삼성 취업도 정말 힘든 비 명문대생이 있다고 치자. 과연 누가 큰 꿈을 꾸는 건가. 서울대생과 지방대생이 삼성전자에 지원하면, 현실적으로 서울대생이 취업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건 비단 꿈의 크기 문제와는 무관하다. '지방대 친구가 pc방을 차려 성공하는 것'과 '서울대생이 대통령이 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큰 꿈일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큰 꿈(아마도 확률적으로 낮은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보다.)이 좋은 건지도 논의 대상이지만, 뭐가 더 확률적으로 낮은 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놈이 가능한 것을 바라는 것이 언제부터 큰 꿈이었을까.


#6. 좋은 의도

나는 저 강사가 나쁜 의도로 저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마. 학생들 앞에다 두고 일부러 학벌주의를 옹호하려고 그랬겠는가. 사람들도 말한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냐고. 다 좋은 의도에서 한 이야기 아니겠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저런 글들이 나도 모르게 불편해진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이다.

 이제는 좋은 의도일지라도 좋은 의미일지라도, 그 표현을 조심해야 하는 시대다. 불편한가? 그래야 마땅하다. 이제 더 이상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시대가 아니니까. 이젠 '아프면 환자지'의 시대다. 정신 차려라. 내 안의 잠재적 꼰대 정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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