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빈은채아빠 Nov 17. 2021

L. 대니얼 호크 <하나님은 왜 폭력에 연루되시는가?>

[내 마음대로 책읽기] 통합과 화해로

오랜 시간 동안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 생활을 했더라도, 구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호전적인 하나님과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모욕을 참으시며 십자가 죽음까지 당하시는 예수님을 일치시키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된다.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과 민족들을 위해 다른 나라를 무참히 전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전쟁의 신으로 나온다. 이것은 용서와 화해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괴리가 크다고 여겨,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왜 폭력에 연루되시는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폭력 또는 폭력성에 대해 창세기부터 열왕기하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통해서 적절한 답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교회 안에서 단편적으로 들은 하나님의 폭력 또는 폭력성은, 신자들로 하여금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도록 만들었고, 이것은 십자군 전쟁을 합리화하게 했다.  


저자는 특별히 구약에 나타난 전쟁의 '전멸'의 개념은 "그 땅과 그곳의 사람들을 정복한 것을 보고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사용된 관용적인 표현"(p. 324)라고 말하며, 신명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은 "가나안 주민들을 무차별하게 살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가나안 주민들의 차이점을 없애려는 것"(p. 334)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토착민들은 "언약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언약 공동체를 규정하는 경계 밖으로 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제거"(p. 333)된다고 말하면서, 가나안의 토착민들이 '완전하게' 전멸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바로 왕이나 가나안의 토착민들에게 보여졌던 폭력은 하나님의 "변덕이나 심판에서 비롯된 것"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도 연관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p. 337). 오히려, 그들의 "누적된 타락" (p. 338)으로 인해 멸망 당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야기는 결코 보복성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보복을 위한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p. 412)고 단호하게 말한다. 신자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경청, 대화, 존경으로 점철된 대화"를 통해 "통합과 화해"를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p. 417).


책의 초반부를 읽을 때는 읽는 재미가 많지 않았다. 아마도 저자가 에덴 동산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들을 성경에 나타난 순서로 검토해 보면서, 하나님의 폭력을 나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해 지자, 읽는 재미도 더해졌다. 하나님은 분노를 표출하시며 폭력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인간이 죄로 가득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폭력을 단편적으로만 보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실천한다면, 교회는 세상과 매일 매순간 싸움만 벌이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화해의 통로로 세상에 비추어야  것이다. L. 대니얼 호크의 <하나님은  폭력에 연루되시는가?> 읽고.

작가의 이전글 박완서 <지렁이 울음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