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이의 교육을 생각하다.
“어머니 계세요?”
“네, 안녕하세요? 어쩐 일로…?”
옆 건물 어린이집 원장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보통 어린이집은 보육 시설이라 6세 2학기에 접어들기 전, 일부 어린이가 유치원으로 옮기는 경우가 있고 그때 결원이 생기는데, 옆 건물 어린이집도 그런 이유로 결원이 발생했고, 우리 아이가 그 빈자리에 들어오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전하기 위해 원장님이 직접 온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내게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다.
평상시 건물 옆 놀이터에서 혼자, 때로는 또래나 언니, 오빠들과 놀던 우리 아이를 원장님이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우리 아이가 특출해서가 아니라 (심한) 아토피 때문에 눈에 띄었을 수도 있고 어린이집 아이들이 야외 활동 시간에 나와 놀 때, 옆에서 보고만 있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예닐곱 살쯤 아이를 어린이 교(보)육 기관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하룬가 이틀 상의 후에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해 아이를 옆 건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자발적인 결정은 아니었으나 능동적인 결정임은 분명했다. 그렇게 우리 아이는 6세 여름에 처음으로 어린이집이라는 보육 시설을 다니게 되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 우리는 주위에서 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느냐는 말을 적잖이 들었다. 우리는 아내가 전업주부여서 아이를 꼭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고, 유치원도 상황에 따라 보내거나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내더라도 어느 정도 타인과의 관계를 스스로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에 보내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 적정 연령을 6세 또는 7세로 보았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시기와 관련해 들은 이야기들은 대체로 아이의 사회성을 키운다는 명목과 함께 유치원 교육과 학교 교육에 앞서 단체 생활이나 학습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린이집 생활을 일찍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럴듯하고 일면 일리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 상식으로는 결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어린이집 입소 시기와 관련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 같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린이집 입소와 관련해서도 당연히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가 형성된다. 어린이집과 관련된 생산자 측은 어린이집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가 많기를 바랄 것이다. 당연히 아이들의 입소 시기가 빠른 것이 이득이다. 소비자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자신의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되지만 생산자의 능동적인 홍보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맞벌이 부부에게는 자녀를 가능한 한 빨리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맞벌이 부부가 적잖은 요즘에는 어린이집 입소 시기가 더욱 빨라졌으리라 짐작한다. 실제 부모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는 경우도 있고, 부모의 생각도 그렇기 때문에 일찍 보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능동적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는 부모는 대체로 생산자의 홍보 논리에 긍정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논리가 맞는 것일까?
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옳은 것을 옳다고 하지 않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만 제대로 되어도 사회는 쉽게 썩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내가 옳은 일을 못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그나마 괜찮다.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 적어도 우리는 선택은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과 그것을 얻고 누리는 것, 즉 성취는 별개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으면 그렇게 살면 된다. 이럴 경우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있겠는가? 막말로, 법에 어긋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에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자신의 의지대로 그른 길을 가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는 옳은 길을 가는 사람과 비교되는 것이 싫어서, 또는 어떤 이유로든 옳고 그름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옳은 것을 그르다고, 그른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기 수준이라면 법적 대응이라도 가능하지만, 단순한 거짓말 혹은 타인의 (자기) 합리화에 당하는 피해는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다.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해 옳지 않은 논리를 옳은 듯 주장하는 건 생각보다 큰 잘못이다. 그래서 더더욱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길이 옳다면 소신껏 옳은 길을 가야 한다. 이래서 철학이 중요하다.
나는 어린이집 입소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 논리에서도 이런 경향을 읽는다.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생산자의 홍보 논리가 자신의 바람과 맞아떨어질 경우, 소비자는 생산자의 적극적인 대변인이 된다. 이게 바로 또 다른 홍보 수단인 ‘구전(口傳)’이 되는 것이다. 잠깐 샛길로 빠지면, 사실 거의 모든 생산자는 홍보 목적으로 충성스러운 고객을 양성(?)한다. 소비자는 자신이 생산자—기업이든 개인이든 상관없이—에게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생산자가 소비자인 자신을 홍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론 모든 생산자의 호의에 이런 계산이 들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어린이집의 경우, 생산자의 홍보 논리와 맞아떨어지는 바람을 지닌 소비자는 어린이집 입소 시기의 연소화(年少化)를 반기거나 추동할 공산이 크다. 그리고 이런 소비자의 적극적 홍보(?)로 인해 다른 소비자 역시 자신의 아이를 매우 이른 시기에 어린이집에 입소시킨다. 오해하지는 말자. 생산자는 뭘 해도 괜찮고 소비자만 지혜로워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생산자가 바람직한 생산 활동을 해야 함이 마땅하고, 제도나 법이 어느 정도 한계를 정해 놓기도 했겠지만, 그럼에도 소비자가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소비자가 스스로 잘 알아야 하는데 의도하지 않게 생산자의 논리에 빠진 소비자 또는 생산자의 논리가 자신에게 이롭다 생각하는 소비자가 같은 위치의 소비자에게 본의 아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는 필요 없다.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야 할 이유로 드는 주요 논리 중 딱 두 가지만 이야기하자. 하나는 사회성 함양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나중에 겪을 일을 미리 경험하게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다. 여기서는 내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연령인 4세 이하를 대상으로 삼는다.
먼저 사회성 함양에 대해 생각해 보자. 4세 이하의 아이에게 사회성이란 무엇일까? 이 시기 아이들에게 과연 사회성이 필요할까? 아니, 이 시기에 필요한 사회성이 꼭 그런 단체 생활을 통해서만 함양될까? 나는 이 시기 아이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성—타인과 어우러져 관계를 맺고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혹 필요하다 해도, 이 시기에는 부모와 형제, 친척과의 상호작용만으로도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회성을 함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4세 이하의 아이들을 잘 관찰하면 한 공간에 함께 있어도 자신의 것에 집중해서 각자 따로 노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아이들이 사회성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 시기의 아이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협동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함께 놀면서 흥미를 느끼는, 그런 사회성이 필요 없다는 반증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집이 나타나기 전에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사회성을 함양했는가? 누군가는 그때는 대가족 시대였다거나 또 형제도 많고 동네에서 함께 놀 친구들도 많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어린이집이 지금처럼 많아진 것이 그리 오랜 일도 아니거니와, 혹 그런 환경이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4세 이하의 아이가 사회성을 기를 수 있었다는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가족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대가족은 보통 3대 이상 한 거주지(가정)에서 생활하는 것인데 실제 3대가 한 가정을 이루어 생활하는 경우, 구성원은 조부모, 부모 그리고 자녀가 된다. 이를 1대, 2대, 3대라고 했을 때, 2대를 이루는 형제가 몇이든, 과거 씨족사회처럼 형제 모두가 결혼 후 가까이 살거나 함께 살지 않는 이상, 그 구성원은 앞서 언급했듯, 조부모, 부모, 자녀가 전부일 것이다. 이런 환경이 지금의 환경과 무엇이 크게 다르다는 말인가? 다르다면 조부모가 함께 살았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이는 사회성 함양을 위해 아이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논거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조부모와 자주 접촉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해 줄 논거 아닌가?
형제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짚어 보자. 3대가 모두 몇 명이어야 사회성이 함양될까? 3대의 형제 터울이 어떠하냐에 따라 첫째의 경우 5세 전에 동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첫째는 어떻게 사회성을 함양할 수 있었을까? 첫째라고 해서 공통적으로 사회성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본 기억이 내게는 없다. 혹 바로 아래에 한두 살 차이로 둘째, 셋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어린 동생들은 그야말로 말도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형제가 많아서 괜찮았다는 말도 4세 이하 어린이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되는 논거다. 이 경우, 첫째 아이가 배울 수 있는 사회성은 어린이집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사회성이다. 그렇다면 이때도 4세 이하의 아이를 대상으로 어린이집 입소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가정 두 자녀 이상 낳기’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동네에서 놀 친구가 많았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역시 4세 이하의 아이가 또래와의 관계에서 사회성을 함양할 수 있다는 근거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4세 이하의 아이들은 밖에서 자기들끼리 능동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운 연령이다. 그렇다면 결국 부모나 나이가 많은 동네 형, 누나, 언니, 오빠들과 함께함으로써 도움을 얻는 것인데 이는 4세 이하의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녀야 하는 당위성을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오히려 어린이집에서는 이 시기에 연령대가 다른 아이들끼리의 교제를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이러이러했기 때문이라는 일부 근거 없는 이유와 비교할 것 없이 실제 4세 이하의 아이에게 어린이집 생활을 통한 사회성 함양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되는데, 이 역시 간단한 사유만으로도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그냥 어린이집이 없었던 시기, 또는 어린이집이 많지 않았던 시기에 4세 이하 아이들이 과연 사회성이 부족한 성인으로 성장했는가만 생각해 보면 되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 이 시기를 지나온 아이들이 특별히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성인으로 성장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이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지 않아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사유로도 4세 이하의 아이에게 어린이집을 다니게 함으로써 사회성을 키워 줘야 한다는 논리에는 반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4세 이하의 아이에게는 친구와 교사보다 부모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상호작용만으로도 이 시기 아이가 경험하고 익혀야 할 사회성은 충분히 익힐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빠든 엄마든, 평상시 주된 양육자가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있는 것이 힘들어서 어린이집에 빨리 보내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이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해할 만하다. 맞벌이 부부여서 아이를 빨리 어린이집에 맡길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면 이 또한 옳고 그름을 떠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이나 사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회성이니 뭐니 다른 이유를 끌어들이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자신이 원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 적합하지도 않은 이유를 찾아 그것이 적합한 이유인 양 억지로 합리화하지는 말자. 물론 좋지 않은 줄 알면서 의도적으로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논리를 옹호하거나 대변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 방식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실현할 가능성이 높은 부모를 헷갈리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제 경험이 주는 이익에 대해 논해 보자. 사회성과도 일부 연결되는 부분인데, 앞선 과정을 먼저 경험하게 하는 것이 4세 이하의 아이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까? 아니, 과연 이익이 있기나 할까? 이 논리의 바탕에는, 무엇이든 시험적으로나마 먼저 경험하면 뒤이어 겪게 되는 실제 상황에 덜 당황하고 더 잘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일면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이 역시 4세 이하의 아이에게도 적용될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이 주장은 궤변에 가까운 홍보 논리다. 생각해 보라.
아이가 6세에서 8세 시기에 겪으면 될 일을, 그때 대응이나 적응을 잘 못할까 봐 4세 이하의 아이에게 미리 경험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성장한 아이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게 쉬울까, 아직 올바른 자타(自他)의 개념도 뚜렷이 정립되지 않은 연령대의 아이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을 미리 경험하면서 겪게 되는 낯선 환경을 이겨 나가기가 쉬울까? 이것은 굳이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혹여 이때의 낯선 경험 또는 부모와의 격리로 야기될 불안과 두려움이 내 아이에게 어떤 악영향을 줄지 누가 알겠는가? 그 충격은 우리(부모) 생각보다 클지도 모른다. 아이마다 특성과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아이는 잘 적응할 수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힘들어 할 수도 있다. 또 부모의 기대와 바람에 부응하는 어린이집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하는 어린이집이 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하나의 틀 안에서 생각할 수는 없다.
어린이집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니고 어린이집이 믿을 수 없는 곳이라는 말도 아니다. 이 또한 적당하면 된다. 적정선을 넘어 욕심이 되는 순간 그 욕심이 잘못된 결과를 낳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 왔다. 요즘 가끔씩 일어나는 어린이집 관련 피해 사건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를 탓하자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일찍 어린이집에 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정말 가능한 한 아이의 양육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의 선택을 뭐라 말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 그들의 환경이 하루빨리 더 나아지길 바라면 바랐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하겠는가? 다만 그런 환경이 아닌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이 더 좋을지 생각하고 더 좋은 길을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그러면 그 부모와 아이가 조금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영향이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나에게도 어떤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내가 두 가지 홍보 논리의 문제점만을 말했지만 실제 어린이집이 줄 수 있는 장점도 분명 존재한다. 연령대에 맞는 놀이나 교육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가정보다야 훨씬 더 전문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다. 이런 장점은 장점대로 인정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역시 가능하면 아이의 부모가—또는 부와 모 각자가—할 수 있는 범위에서 직접 교구를 만들어 교육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4세 이하의 아이에게는 말이다. 이때의 아이에게는 그리 많은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하나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 되고 새로운 지식이 된다. 학자들이 발견한 아동의 발달 단계를 굳이 습득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보면 정말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분야였는데 어느 때가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매우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다가도 또 어느 순간 관심을 뚝 끊고 다른 분야에 관심을 쏟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4세 이하의 아이에게 어떤 자극이 필요한지 공부해 보라. 너무 많은 정보를 섭렵할 필요는 없다. 보편적인 육아 책자나 인터넷, TV 등의 매체를 통해 좋은 방법을 택해, 가능한 범위에서 직접 아이에게 필요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공간이나 교구를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여기서 가능한 범위라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것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만큼이면 족하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날 때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것이다. ‘최선의 노력’과 ‘최대의 노력’은 다르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노력하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까지 애써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비교도 안 하는 것이 낫다. 이는 꼭 육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는 최고를 원하지만 모두 최고가 될 수는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최고와 그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 또 그다음을 수직적 관계로 보지 않고 수평적 관계로 볼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가치를 보고 인정할 줄 아는 눈과 철학이 필요하지, 수직으로 줄을 세워 계속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아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능력과 일이 있다. 우열은 없다고도 했다. 소망은 품되 욕심은 버리자. 무엇이 나에게 소망이고 무엇이 나에게 욕심인지는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이것이 발전과 성장과는 다른 이야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줄로 믿는다. 일반적으로 4세 이하의 아이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필요도, 겪게 해 줄 필요도 없다.
우리 아이의 경우, 아내가 직접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범위에서 다양한 교구들을 만들어 사용했고, 한글이나 수(數) 개념 등도 아이가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또는 능동적으로 배우고 싶어 할 경우에 한해 나나 아내가 조금씩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교육만 진행했다. 한글도 숫자도 억지로 가르치지 않았다. 한글의 경우, 우리가 읽어 주는 책을 보기만 하던 아이가 5세 초반에 잠깐 관심을 보이며 말도 안 되는 글을 스스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5세 중반쯤 되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더니 스스로 몇 개의 글자를 통으로 알게 되면서 질문이 많아졌고 그때부터 내가 한글의 기본이라 생각하는 내용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학습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아이가 보고 싶은 책을 보며 한글을 가까이하더니 실제 그 해가 가기 전에 한글은 거의 다 뗄 수 있었다. 그리고 6세가 되면서 스스로 책을 읽는 수준이 되었다. 이 정도면 보통인지, 조금 빠른 것인지, 느린 것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우리 아이가 특별히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고, 어느 때는 조금 떨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6세 여름이 되면서 다니기 시작한 어린이집에서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한글을 더 잘 알고,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 아이가 조금 빨랐던가 싶긴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경험으로 내가 느낀 것은 유아 시기 아이의 교육은 굳이 부모가 목표를 정하고 과정을 설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이의 특성과 타고난 재능에 따라 학습 시기와 속도가 다를 수 있어서 어떤 분야는 남보다 조금 더 빨리 배울 수도 있고 또 어떤 분야는 조금 더 늦게 배울 수도 있다. 우리 아이의 사례가 일반화될 수도 없을뿐더러 모든 아이는 저마다 주체이기 때문에 동일한 방식과 기준으로 아이를 대해서는 안 된다.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4세 이하의 어린아이에게 학습이나 환경 적응에 대한 부담을 안겨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육 방식이 아니다. 어떤 것을 가르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때’와 ‘속도’다. 그에 맞게 교육이 진행되어야 한다. 때가 되면 그리고 자신의 속도에 맞기만 하다면 아이는 재미있고 신나게 학습에 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랬을 때, 학습 효과도 높고 이어서 또 다른 학습이 가능해진다. 일반적인 발달 시기를 훌쩍 지날 때까지 어떤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그 원인을 찾아야 할 때도 있지만, 그 외에는 조금 느리다고 걱정할 일도, 조금 빠르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부모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비교 심리와 그에 따른 조바심만 버린다면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알맞은 ‘때’에 필요한 것을 배우고 익히면서 문제없이 잘 성장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