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定義)의 재정의(再定義) 1

13. 이해는 너그럽게 인정은 까다롭게

by 조종상

우리는 ‘이해’와 ‘인정’을 유사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것을 그 사람이나 그 사안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해와 인정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이해를 ‘잘 알아서 받아들임’으로, 인정을 ‘확실히 그렇다고 여김’으로 정의한다. 이 의미를 좀 더 깊이 파고들어, 나는 ‘이해’를 ‘그럴 수 있다(can)’로, ‘인정’을 ‘그래야 한다(must)’로 정의한다. 이해는 ‘가능성’으로, 인정은 ‘당위성’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 누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말하고 또 누구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생각지 못한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어떤 일은 정말 이해할 수 없고, 또 어떤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좋은 일이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문제 될 여지가 없겠지만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좋지 않은 일에 쓰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말을 할 만한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 게 좋긴 하다. 그러나 TV나 인터넷 사이트, 신문 기사를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며 분노하거나 탄식한다.


사실 인간이 어떠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선을 의지적으로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악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비교적 더 선하고 덜 선하고 덜 악하고 더 악한 사람이 있는 셈이다. 이를 자료 삼아 현 인류의 구성을 조사하면 아마도 그 결과가 정규분포 곡선을 따를지도 모르지만 구성 비율이 정확한가는 차치하고, 그 곡선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세상의 한 구성원이니까 말이다. 사람이니까 그런(?) 짓을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을 본다면 사람에 대한 기대도, 실망도 정도(程度)를 넘어서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기대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사람을 사랑하기도 쉽지 않고, 사람에게 기대를 안 하기도 쉽지는 않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조금 더 냉철한 이성으로 사람을 이해해야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성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감정이 개입하고, 감정이 개입하면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지며,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지면 결국 비이성적 반응을 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데 방해가 될 공산이 크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존재하며 또 사람은 경우에 따라 충분히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강한 면도 물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나약하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아무리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다 해도 인간은 한낱 자연의 일부일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해의 폭을 더 넓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약한 존재니까 말이다.

이 말은 그만큼 우리에게 이성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잘못에 관대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해의 대상은 사회 구성원 모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인정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이해와 견주어 인정의 폭은 더욱 좁혀야 한다. 인정은 ‘그래야 한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맞고 옳다’고 수긍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도 되는 표현이 아니다. “뭐 단어 하나 가지고 그렇게까지 말하느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정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를 조금 더 심각하게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람을 또는 그 무엇을 ‘인정’하는 순간, 그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해’와 ‘인정’의 의미와 그 차이를 잘 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적절한 ‘대응’이 가능해진다. 그래야 행동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게 하거나 치르게 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 분명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 아니겠는가.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려면 ‘이해’와 ‘인정’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소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은 자신과 부양가족을 위해 빵을 훔친다. 나는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의 물건을 훔친 장발장의 행위가 잘못임은 ‘인정’한다. 법이 규정한 범위에서 정상 참작을 할 수는 있지만 훔친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빵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이해할 만한 사정이 있는 장발장에게 5년 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 판결은 분명 잘못이다. ‘이해’의 부족이다. 소설 속 내용이기에 가정(if)이 무의미하긴 하지만 만약 ‘이해’와 ‘인정’이 적절히 적용되었다면 합리적인 양형이 선고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가치 속에서 살아간다. 그중에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해’와 ‘인정’의 차이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연약한 사람이니까, 선하면서도 악한 인간이니까 어떤 이유로든 그 가치를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인가 아닌가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가치는 보편적인 정의(正義)의 관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인가 아닌가로 판단해야 한다. 개인의 개성은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그 가치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범위여야 한다는 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 아닐까?


이해와 인정은 다르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혹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인정해야 할 일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공동체의 관점에서 더 나은 사회를 구축하길 원한다면 이해는 너그럽게 하되 인정은 까다롭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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