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을 찾자!

3. 어떤 일(직업)이 내 일인가?

by 조종상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좀 더 명예로운(?)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명예로운’이란 표현보다는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혹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란 표현이 조금 더 적절할까?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이런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경쟁을 해야 하고 그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렇게 자연스레 경쟁에서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다른 계층을 형성한다.




언젠가 정부의 한 공직자가 사석에서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큰 봉변을 당한 일이 있다.(그 일로 파면당한 공직자가 행정소송을 제기해 2심까지 승소, 최근 복직 판결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쥔(?) 자들의 횡포도 꾸준히 도마에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신분제는 계층 또는 계급을 말한다고 할 수 있으며 갑질 역시 그 주체(主體)와 객체(客體)는 다양하지만 계층의 폭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은 신분제가 존재하는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이 공직자의 생각에서, 또는 ‘갑질’이라는 용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사회는 계층화되어 있다. 인정하기 싫고 사실상 인정할 일도 아니나 사회 전반에 흐르는 이런 기류를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체감한다. 일반 서민들이 이런 현상을 달가워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민들이 이런 사회 형성에 일조한다.

무슨 말일까? 우리는 보통 계층화된 사회현상을 개탄하는 한편 버젓이 상위라 생각하는 계층을 동경하고 그 계층에 진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사회에 해를 끼친 대기업을 욕하면서 자기 자식이 그 대기업에 들어가면 자랑을 해대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모습이다. 당사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합리적인 제도와 공정한 규칙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여 기업을 일구거나, 진정 공직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공직자가 되려 노력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히 경쟁하고 경쟁의 결과가 계층의 분화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익보다는 사익이 우선이고,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정이나 정의라는 개념은 불필요한 요소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도 보통은 더 많은 돈을 벌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당연히 살기 힘든 사회다.


brushes-3129361.jpg


모두가 같은 일을 하며 살 수는 없다.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재능과 역할이 있다. 그 재능과 역할을 찾는 일이 우선이다. 살다 보면 이 일도 할 수 있고 저 일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어떤 일에든 적응이 가능하고 거기에서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일이 다 그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기본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 공직자의 말 중에 ‘민중은 개, 돼지’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 어느 영화 대사를 인용한 것이라고 하나 그 말을 공감했기에 그리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생각을 지닌 공직자가 과연 그 사람 한 명뿐일까? 아닐 것이다. 아무튼 이 말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민중이 바른 철학을 세워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제도는 인간에 적합한 수준이 아니라 개, 돼지에 어울리는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말이다. 사실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민중이라는 말을 따로 구분 지을 필요가 있을까? 지배와 피지배를 떠나 사회가 합의한 정당한 제도와 법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아닌가? 자신은 민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민중은 통제와 조종과 이용의 대상이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을 민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민중이 낸 세금으로 국가의 녹을 먹고사는 사람이 민중을 개, 돼지쯤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현실이 그렇다. 고위 공직자든, 대기업 회장이든, 그냥 재벌이든, 재벌의 자손이든 일반적인 삶과 괴리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서민은 그냥 자신들과 다른 일군(一群)의 사람들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서민의 눈에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가. 진부한 표현일진 몰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같이 어우러져 살아야 할 존재다. 민중과, 민중이 아닌 자로 나눌 필요도 나뉠 이유도 없다. 우리에게는 각각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바르게 수행함으로써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누구나 선호하는 소수의 일로만 몰려가선 안 된다. 이는 불필요한 경쟁을 낳고 경쟁은 계층을 낳고 계층은 동경을 낳고 동경은 욕심을 낳고 욕심은 불행을 초래한다.


‘쟤는 저런데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돼?’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비교처럼 나 자신을 못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비교한다면 누구까지를 비교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어차피 늘 비교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비교의 대상을 만들 필요도, 본인이 비교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다.


나와 타인을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세.
나 자신을 겸손하면서도 주체적인 개인이 되게 하는 첫걸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사명감을 지니고 열심히 그 일을 수행함이 더 값지다.


돈 혹은 타인의 인정을 기준으로 내 일을 찾지 말자. 직업인 그 이상의 참된 꿈을 품고 내가 잘 하는 일,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해야 할), 능력(할 수 있는), 바람(하고 싶은, 적어도 하기 싫지는 않은) 이 세 요소가 잘 부합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 내 역량, 그 이상의 목표를 좇을 때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쉽게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내 몫과 역할은 일정 부분 정해져 있다고 생각함이 좋다. 그래야 큰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된다. 귀가 귀의 역할을 해야지, 심장의 역할을 하려 하면 되겠는가? 발이 발의 역할을 해야지, 뇌의 역할을 하려 하면 되겠는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 이는 상식 선에서 누구나 자신의 사유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 아닌가? 물론 그러면 어떻게 발전이 있겠느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조건 큰 목표, 누구나 동경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이루어야만 발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발전은 자신이 맡은 일, 자신에게 맞는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더욱더 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쓰면 더 좋을 단어다. 귀가 심장이 되고, 발이 뇌가 되는 것을 발전이라 말함이 적절할까? 오해하지 말자. 태어날 때부터 귀와 발이 꼭 정해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우리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발견하거나 계발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없던 능력도 개발할 수 있다. 그 노력 자체를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그 시작이 돈과 세인의 동경에서 비롯되고, 그 결과가 돈과 명예(?)로만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맞는 일이 자신이 원하는 경제적, 사회적 만족에 못 미쳐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판단할 정도만 아니라면, 그 일을 잘 해내기 위한 노력이, 나와는 맞지 않는 일(직업)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보다 훨씬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 경험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에 맞지 않는 인물,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될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라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끔찍했던가를.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 아닐까? 내 일이 아닐 때는 끄덕일 수 있는 사유도 내 일이 되면 달라지는 것인가?


그래서 철학이다. 형편에 따라,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사유가 아니라 상식을 바탕으로 한 생각과 그 생각을 쌓아 만든 사고 체계. 철학은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다.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이것이 바로 철학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엔 그 무엇보다 바른 철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내 일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