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이가 생기다.
두 줄..
아내가 슬며시 내민 임신 테스트기에 선명히 드러난 두 줄. 두 줄이 분명했다. 놀라움과 기쁨이, 얼떨떨함과 감사함이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결혼한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 내가 드디어 아빠가 되는구나...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으니 그때부터 부딪치는 모든 일이 낯선 일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와 아내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때가. 시동은 아내가 먼저 걸었다. 아내의 능동성에 동화된 나는 아내와 함께 이제 막 삶이 시작된 뱃속 아이를 위해 할 일을 시작했다.
부모가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의 삶에 한 생명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잘해야 할 텐데, 잘 키워야 하는데. 머리 한 구석에서 이런저런 생각과 기대, 계획과 염려 등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남들 하는 대로 그냥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무엇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생각과 행동인지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대부분 아이를 낳는다. 물론 자신의 인생을 위해, 또는 다른 이유로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경우도 있고, 낳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임신이 되지 않아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임신이 어려운 경우, 의술의 힘을 빌려 임신과 출산에 성공하는 부부도 있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입양을 선택하는 부부도 있다. 물론 다른 이유로 입양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를 원치 않는 부부를 제외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부부에게 아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이번 주제는 육아다. 육아에 어떤 철학이 필요한지, 어떤 생각과 자세로 육아에 접근함이 바람직한지에 관해 논할 예정이다. 물론 육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임신과 출산은 내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지도 모른다. 엄마가 느끼는 기쁨과 감동, 어려움과 고통을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함께한 자로서 경험과 생각을 논할 수는 있으리라 믿는다. 임신 및 출산, 교육과 체벌에 관한 내용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아이가 생기다
아이를 임신한 엄마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육아의 주체가 된다. 자신의 몸속에서 한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아주 진지하고 책임 있게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육아는 시작된다. 이 말은 임신을 확인한 임부는 그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한 아이의 엄마로, 중요한 양육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부담이나 스트레스로 받아들일 엄마는 없겠지만 사실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바라던 임신은 기쁠지 몰라도 앞으로 체험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는가. 그래도 임신임을 확인한 순간부터 아내는 적어도 엄마로서 지녀야 할 마음과 자세를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저절로 품게 되는 임부도 있고 애써 노력해야 하는 임부도 있다. 사람은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의 임신에 대해 객체(客體)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아내의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남편 또한, 한 아이의 아빠로 그리고 중요한 양육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아내의 심신이 평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찾아서 실행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아내가 하는 일을 분담하라는 뜻이 아니다. 드러나게 꼭 어떤 변화를 꾀하지 않아도 된다. 남편이 아내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각자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아내에게는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면 이 시기부터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훌륭한 육아는 바로 이런 인식에서 시작된다.
첫 임신을 하면 예비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경우가 많다.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될 것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그래도 이 시기에는 이제 갓 엄마의 역할이 시작된, 아내의 고민이 더 많을 수밖에 없고, 노력도 더 많이 해야 한다. 아이가 있는 곳이 바로 엄마의 몸속 아닌가. 이때부터 엄마의 생활은 태아의 건강과 직결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자신의 사소한 신체 변화에 당황하기도 하고 환경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누군가 속 시원히 알려 주면 좋겠는데 마땅히 그럴 만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임신을 하게 되면 대체로 아내는 가까운 병원이나 원하는 병원을 정해서 정기 검사를 받으며 도움을 얻는다. 이것이 보편적인 모습이고 또 사회적으로 권장하는 예비 엄마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남편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임신에 대해서 아내보다 더 잘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맞을까? 문제는 없을까?
모든 동물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생명을 낳아 개체를 번식시킨다. 생물학적 분류로 동물에 속하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만이 경험하는 특별한 과정이 아니다. 물론 그 자연스러운 과정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경험칙상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 특히 의료계는 임부가 지켜야 할 나름의 지침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전문적으로 이 분야를 연구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합리적인 지침을 만들어 적용하는 것이 의료계의 책무이자 의사나 병원에도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잉이다. 이런 경우를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것. 거기에는 물론 인간의 욕심도 한몫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아내가 임신의 징후를 느끼면 부부는 임신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현재 일반적으로 임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임신 테스트기를 구입해 개인이 직접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것이다. 보통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다 활용하는데, 병원의 확진이 최종 판결(?)이 된다. 그렇게 병원에 가서 임신을 확인하고 첫 진료를 받으면 이후부터 정기적인 병원 진료 일정이 잡힌다. 어느 시기가 되면 어떤 검사를 해야 하고, 어느 시기가 되면 어떤 영양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의사나 병원은 정해진 지침에 따라 진료와 처방을 하고 임부는 그 지침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임신을 처음 한 엄마로서 아내는 자신의 건강과 태아의 건강을 위해 자신보다 임신과 관련해 더 많이 알 것이라 생각하는 의사와 병원에 자신과 태아를 맡길 수밖에 없다. 남편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남편들은 대부분 병원의 지침에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더욱이 태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남아인지, 여아인지, 건강에 문제는 없는지 등, 안 그래도 궁금한 것들이 많은데, 병원이 가능한 범위에서 궁금증을 풀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가 생각하는 과잉과 욕심이 바로 이것이다. 과연 임부에게 정기 검사가 꼭 필요할까?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꼭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임신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특별히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기보다 건강하고 바른 생활로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다. 건강하고 바르게 못살겠어서 병원을 의지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말자. 그것은 자신을, 아무런 노력 없이 그냥 아이를 기계적으로 낳는 생명체로 여기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노력한다 해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 임부가 있을 수는 있다.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임부가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모든 임부가 그런 상황을 전제해야 하는 걸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또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안전한 의료 기기를 사용하기만 한다면, 태아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의료 기기의 영향이 아주 없거나 미세할지라도 그런 물리적 간섭이 태아에게 좋을 일은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의학적으로 무지한 내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라 여겨진다. 합리적 의심이라고나 할까?
나는 정기적인 태아 검사는 소비자, 즉 임부 또는 예비 부모의 염려를 미끼(?)로 삼은 병원의 과잉 의료 행위이자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병원의 지침에 따르는 예비 부모에게도 염려의 과잉과 태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공존한다고 확신한다. 이것을 왜 과잉이라고, 왜 욕심이라고 표현하는지 당사자들은 기분 나쁘게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보인다.
원래 생산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수익을 확대하려 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의사나 병원 역시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생산자로서 자신의 수익 확대를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생산자가 너무 자신의 수익에만 신경 쓴다면, 소비자가 도의적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특별히 병원처럼 공공재의 성격—공공재는 아니지만—을 띠는 생산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우리나라만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우리나라 국민이 건강 염려증(?)이 많다고 하지 않는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요즘 TV 방송을 보면 건강 관련 프로그램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임부에 대한 의사나 병원의 지침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약간 빗나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사례를 덧붙이면 다양한 민간 보험 판매와 가입 권유를 들 수 있다. 보험이야말로 상당히 모순성이 강한 상품이다. 소비자가 적잖은 돈을 내는데 그 생산품(효과)은 절대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상품. 오히려 건강을 위해 운동이나 식품 등 다른 방법으로 또 돈을 쓸지언정 절대 그 효과는 보려 하지 않는 상품.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효과를 맛보면 그 효과 때문에라도 가능한 한, 또 다른 상품을 찾게 되는 소비의 악순환(?). 그런데 거의 아무도 악순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순. 보험 역시 생산자는 소비자의 건강이나 사고에 대한 염려를 미끼로 삼고 소비자는 염려의 과잉으로 비합리적 소비를 한다.
무엇이든 적당하면 괜찮다. 문제는 과잉이다. 생산자는 어떻게든 소비를 장려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생산자에게 도덕을 강제할 수는 없다. 법이 잘 만들어져 있든 어설프게 만들어져 있든, 최소한 만들어져 있는 법만이라도 잘 지키길 바랄 뿐이다. 소비자는 모두 정직한 생산자를 원하지만 정작 자신이 생산자가 되면 소비자로서의 바람을 잊어버리거나 애써 잊는 것이 또 우리 인간 아닌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결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정부에, 또는 공공 영역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과 힘을 부여한 것이다. 소비자는 어떻게든 합리적 소비를 하고 싶지만 언제나 생산자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생산자는 자신의 수익을 위해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반면 개별 소비자는 대체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 힘을 모아 활동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임부가 정기 검사를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적당히 하자는 말이다. 소비자가 더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다. 특별히 건강에 관해서는 조금 더 담대해져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태아의 부모이고 양육자다. 어떤 이보다 더 큰 책임과 의무를 지고 태아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하고 진정한 사랑을 전하고자 애써야 한다. 여기서 사랑을 전한다는 것은 태아에 관한 모든 일에 사랑의 감정을 적용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말이다. 잘 모른다고,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생명이라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려 하거나 그냥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고민 없이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모르니까 내 생각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 역시 부모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다. 병원의 지침에 따르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한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아이에게 유익한지 고민하고 행동하라는 얘기다. 병원에서 주는 정보뿐 아니라 스스로 육아와 관련한 책을 찾아서 본다거나 관련 정보를 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때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철학이 중요하다. 철학이 중심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철학이 있으면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육아, 더 멀리 보면 자녀의 교육이 내 인생에서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올바르게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가 올바르게 잘 살아서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우리가 거의 이론적으로만(?) 추구하는, 인성이 잘 갖추어진 아이를 키워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사회에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거창하게 사회를 위해 어떤 능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 선한 영향을 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선(善)이 무엇인가는 구체적으로 논할 필요가 없다. 너무 다양할 뿐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생각에 코웃음을 칠 뿐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인생이 어려운 것이다. 내 자녀의 인성이 좋다고 세상이 살기 좋아지겠는가? 자녀에게 인성만 중요하겠는가? 지성도 필요하고 감성도 필요하다. 심어 주고 키워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래도 바탕은 인성이다. 인성이 바탕이 되어야 지성도 감성도, 그 외 다른 특성도 그 기능을 바르게 잘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과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인성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태교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교의 시작
우리는 보통 첫째와 둘째는 다르다고(셋째 이상은 논외로 하자.) 말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첫째들과 둘째들은 저마다 유사한 성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어떤 연구에 의해 검증된 결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둘 이상의 아이를 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첫째에 대한 특성과 둘째에 대한 특성이 각각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물론 그 이야기를 100%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무튼 첫째는 첫째라서, 둘째는 둘째라서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 건 사실이다. 그것이 정말 객관적으로 맞는지는 차치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첫째와 둘째의 차이를 느낀다면 실제 어느 정도 그렇다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길까? 나는 태교에서 그 차이가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태교는 단순히 외부적(?) 교육을 말함이 아니다. 예컨대, 임신 중, 아빠가 엄마 배에 대고 책을 읽어 준다거나 엄마가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는 말이다. 태교라고 하면 흔히 이런 형태의 교육을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사전적 의미도 이와는 다르거니와, 내가 말하는 태교 역시 그런 형식의 교육이 아니다. 바로 엄마의 마음가짐이다. 기본적으로 첫째와 둘째의 타고난 성향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엄마, 같은 아빠, 그리고 어느 정도 같은 형태의 외부적 교육을 시행한 같은 자녀임에도 첫째와 둘째의 성향이 두드러지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차이가, 엄마가 임신했을 때 품게 되는 마음 혹은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첫째 때는 처음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여러 마음과 감정이 있을 것이고, 둘째 때는 둘째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감정이 있을 터인데 이 둘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출생 후 육아 과정에서 성격이 형성되는 부분도 분명 있기 때문에 첫째와 둘째의 차이는 출생 후에 형성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하면 된다. 다만, 임신 중 엄마의 마음 역시 태아에게 분명히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말이 아니어서 사담(私談) 정도로 받아들여도 좋다. 비록 실험을 통한 연구로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 내 사유에 의한 가정 또는 짐작이지만 터무니없는 사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실험으로 증명하기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내가 정작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아이를 임신했을 때 엄마의 마음이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그것도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말이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전제하고 말하면, 엄마는 자신의 마음 또는 감정을 통해서도 육아가 가능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임신을 하면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먹어라’라는 옛말이 괜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아빠는 어떠한가? 아빠는 엄마의 마음과 감정에 매우 큰 영향을 주는 존재다. 따라서 아빠도 엄마의 마음이 하는 태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진지하게 인식해야 한다. 남편은 임신한 아내의 신체적, 심리적 건강을 위해 힘써야 한다. 임신으로 인한 심신의 변화, 감정, 두려움 등은 오로지 임신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남편은 이를 인정하고, 아내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가능한 한 아내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도 아내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남편의 역할은 이성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수준에서 설정하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편이 아내를 아끼고 아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것만으로도 임신 기간은 충분히 무탈하게 보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할 이유가 없다. 임신 초기와 말기에 조심해야 할 부분들, 그리고 임부에게 필요한 영양소 등, 임부가 알아야 할 유의 사항은 병원에서 임신을 확인하면서 알 수 있고 또는 책이나 인터넷 등 다른 경로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서 매번 병원에 방문해 점검하고 확인할 필요가 없다. 병원에 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숙고해서 내린 결론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뜻이다. 내가 계속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그냥 어떤 고민 없이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 하지는 말아야 한다.’이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우리 부부의 사례를 싣는다. 우리 부부는 첫째와 둘째 모두 병원이 아닌 조산원에서 출산했다. 병원에 간 횟수는 첫째의 경우, 임신 확인 차 두 번(첫 번째 방문이 너무 일러서 1주 뒤에 다시 방문했기 때문이다.), 초기에 아내가 착상혈(병원 설명)을 보여서 한 번, 출산 전 태아 상태 확인 차 한 번, 이렇게 총 네 번이 전부다. 마지막은 조산원에서 출산 전에 의료적으로 확인해야 할 내용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빈혈 수치가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간중간 신체 변화에 따라 생기는 궁금증은 병원에 전화로 문의하거나 책 또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로 확인했고 가끔 괜한 걱정이 들 때에는 임신과 출산이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서로에게 주지시켰다. 둘째 때는 첫째의 경험을 발판 삼아 조금 더 여유로울 수 있었다. 병원에 간 횟수는 처음 임신 확인을 위해 보건소에 간 것까지 포함해 총 세 번이다. 정작 병원은 고운맘 카드를 만들기 위해 한 번,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출산 전 태아 상태 확인을 위한 조산원의 요청으로 한 번, 이렇게 두 번 간 것이 전부였다. 병원에 덜 간 것을 자랑삼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부부의 사례가 정답이라는 말도 아니다. 비교 대상이 될 일도 아니다.
기본과 예외를 명확히 인식하자.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과 욕심 때문에 예외가 기본이 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실 건강과 관련해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다만 경우마다 다를 수 있기(case by case) 때문에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뿐이다.
임신과 출산은 섭리이자 아내와 남편이 힘을 모아 충분히 해 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신체적으로는 이 모든 과정을 오롯이 아내 혼자 감당해야 하지만, 남편이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함께 노력한다면 아내에게 분명 커다란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체적으로 임신 또는 출산에 문제가 있는 임부도 분명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도 태아에게 행해지는 물리적, 화학적 간섭은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에도 아빠, 엄마가 바른 철학을 바탕으로 소신껏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이런저런 사례나 연구 결과로 내 주장을 뒷받침할 생각은 특별히 없다. 전 세계, 아니 우리나라로만 국한하더라도 사람 사는 일이란 게 대부분, 어떤 일이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험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사실 인간을 대상으로 행하는 실험을 통해 정확한 불변의 결과를 도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든 심리든 마찬가지다. 실험으로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려면 그 전제가 되는 조건을 100% 맞춰야 하는데 인간을 대상으로 그 조건을 100% 맞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어찌 사람을 원하는 실험 조건에 똑같이 맞출 수 있겠는가? 아주 쉽고 간단한 실험이라 해도 전제가 되는 인간의 신체나 심리적 조건을 원하는 대로 맞추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어떤 실험이든 그 결론에 모든 사람, 특히 나 자신을 일부러 꿰어 맞출 필요는 없다. 물론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기본은 분명 존재한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철학을 잘 구축하면 기본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을 잘 이해하면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에 한걸음 더 가까워진다.
임신과 출산은 진료받고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니다. 임부는 환자가 아니다. 내가 아빠가 될 사람이라면, 내가 엄마가 될 사람이라면 조금만 더 용기를 내자. 조금만 더 아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을 담아 노력하자. 내 아이는 소중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