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y He Arrives, 2011
홍상수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지만, 딱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기 쉽지 않다. 내게는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인트로덕션>을 제외한 28편의 영화 중 <북촌방향>이 특히 그랬다. <극장전>(2005)을 보고서는 영화의 러닝타임은 끝났지만, 영화가 끝나고서 비로소 영화가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를 보고서는 거의 동일하게 다시 한번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나와 형성되는 관계가 눈에 보였다. <북촌방향>은 <강원도의 힘>(1998)이나 <해변의 여인>(2006)처럼 어떤 공간을 말하는 것 같으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나 <하하하>(夏夏夏)(2009)처럼 시간을 지칭하는 제목과도 일맥하지 않는 것 같다.
<북촌방향>의 이야기는 사실 단순하다.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이 친한 형인 영호(김상중)를 만나기 위해 북촌으로 향한다 [A]. 과거에 연인이었던 경진(김보경)을 잠시 만나고 [B], 영호가 소개해준 후배 보람(송선미)과 함께 간 술집에서 경진과 꼭 닮은 예전(김보경)을 만나 호감을 갖게 되고 [C], 예전과의 하루를 보낸 후 다시 영호를 만나러 간다 [D]. 끝이다. 79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이것에 더도 덜도 없다. 그런데 얼핏 흘러가는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말 그대로 A-B-C-D의 흐름일 수도 있고, C-D-A-B일 수도, 혹은 북촌에 도착한 성준에게 찾아올 수 있는 사건들의 다양한 경우의 수일 수도 있다(A-A1-A2-A3). 여러 갈래의 가능성이 동시에 성립할 순 없더라도, 그 모든 것들을 보는 이로 하여금 체험하게 한다. 시간을 다룬 매체는, 작품은 많이 있으나 단지 설정, 소재에 불과한 것과는 다른 영역에 있다.
애초에 성준이 겪은 사건의 흐름은 분명 있을 테고, 홍상수가 영화를 그렇게 진행시켰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것을 기대할 사람이 아니다. 평이하게 흘러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방해할 사람이 아니겠는가. <북촌방향>은 영화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이다. 시간을 소재로 한 아이러니는 문학작품에서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북촌방향>은 머릿속으로 막연하게나마 상상해보는 것이 아닌, 보여주는 대로 체험하게 한다.
다시, <북촌방향>은 현실에서 <북촌방향>의 꿈속으로 향하게 하는지, 꿈에서 <북촌방향>의 현실로 향하게 하는지, 꿈에서 꿈인지, 현실에서 현실로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북촌방향>으로 계속해서 이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이끌려간다. 마치 마지막 장면에서 성준이 그의 오랜 팬이라는 이(고현정)의 말에 홀려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종국에 영화 속 배우들이 한 장면에 다 담기는 장면, 이 영화에서 성준이 연주하는 피아노를 제외하고 화면 밖에서 유일하게 음악이 등장하는 장면으로부터 새벽녘 북촌로에 쏟아져 나와 모두가 제멋대로 행동을 취하는 묘한 장면에서 말 그대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거기서 끝났어도 될 것을 홍상수는 한 번 더 비튼다. 지금까지는 영화의 오프닝인 것 같고, 이제 여기서부터 영화가 시작이라고 하는 것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서야 거기서 끝을 낸다. <극장전>은 영화가 끝나고서야 영화가 시작했다면, <북촌방향>은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가 시작한다. 뭐라도 아는 것처럼 말했지만 결국, 영화 속 성준의 말처럼, 삶의 다양한 조화를 느끼면 된다.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서 계속해서 무엇을 말한다고 꼭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닐 테니. <도망친 여자>(2019) 속 대사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그것이 꼭 다 진심을 아닐 테니. 그러나 그 반복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있으니 나는 또 <북촌방향>으로 기꺼이 홀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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