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s, 2020
원인을 알 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이 감기처럼, 오늘날의 코로나처럼 많은 이들에게 퍼졌다. 어디로 가려는 건지 버스에 오른 알리스(알리스 세르베탈리스)는 창문에 기대어 잠들었다가 종점까지 가고 만다. 알리스는 어디로 가려고 했을까. 그는 어디로 가려고 했음은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신원미상으로 분류되어 병원에 수용된다. 연락할 수 있는 가족도 찾지 못해 무연고자가 된 그에게 “신경 병원 장애 기억 부서”에서 진행하는 새로운 자아를 찾는 프로그램을 권유한다. 이 프로그램은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이들의 기억이 돌아오게 하는 것보단 새로운 기억과 경험을 만들어보게 함으로써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2020년에 나온 영화이나 스마트폰은 없고 녹음된 테이프에 새로운 지령들이 전달되고, 수행자들은 그것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기록한다. 그 경험이란 것도 예사롭진 않다. 차로 나무에 들이받기, 높은 곳에서 다이빙하기, 파티에서 상대방을 유혹해 화장실에서 섹스하기처럼 말이다.
그 심리를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의 알리스가 주어진 지령을 잘 수행하던 중 역시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안나(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를 만나게 된다. 같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가까워진다. 그녀는 지령 수행률이 자신보다 빨랐는데, 그래서 뒤늦게 안나와 함께했던 시간들, 경험들, 기억들이 그녀의 진심이 아닌 그저 프로그램의 일환이었음을 알게 된다. 진심이 담겨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아니 애초에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그런 것을 계산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잔혹한 일이던가. 또 그것은 혼자서는 절대 정답을 알 수 없다. 같은 경험을 두고도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렇게 모두가 다른 정체성이 확립되는 과정을, 그것의 본질을 꿰뚫는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알리스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즈음, 이쯤 됐는데 뭐가 나오지 않으면 영화가 너무 평범하다고 싶을 즈음,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사실, 알리스는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었던 것 같다. 알리스는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고, 그것의 상실감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소리 지르며 울부짖는 대신, 아니 울음도 나오지 않았던 그에게 새로운 자아를 형성하는 프로그램은 실패로 끝이 나는 것 같았고, 알리스는 벗어나고자 했던 슬픈 기억과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직업도, 나이도, 현재의 감정상태도 짐작할 수 없을 것 같던 무표정한 얼굴에서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 더한 통증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렇게나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알리스는 폴라로이드를 통해 지령을 수행해오던 어느 날 길을 지나다가 한 커플의 흑백 영상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그랬듯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다.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이 퍼진 이유를. 왜 기억력에 좋다는 사과를 아무도 사가지 않는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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