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hattan, 1979
저 먼 나라의 도시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고층빌딩. 그 빌딩 숲들을 지나며 벌집처럼 빼곡하게 나있는 창문을 바라본다. 저 작은 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을까. 저 높은 빌딩들 사이에 홀로 몇 개의 층만 유지하고 있는 작은 건물을 보고 있으면 또 새삼 반가울 수가 없다. 높게 솟아있는 건물들 때문에 바로 몇 미터 앞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상황은 숨이 막힌다. <하나 그리고 둘>(2000)의 양양이 그 너머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줬으면 싶다.
영화 <맨하탄> 속 인물들은 다 그렇다. 빈센트 반 ‘고크’가 어떠니, 키르케고르가 어쨌니 고지식한 척 하지만 그것에 감추고 있는 이면의 모습들이 있다. 만화 속 괴짜 박사 같은 모습을 한, 키는 작고 머리는 벗어진,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쓴 아이작(우디 앨런)은 호불호가 명확하다. 아니, 싫어하는 것은 분명한데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특정할 수 없다. 17세 소녀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만나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하는, 나의 죄책감과 너의 미래를 말하면서도 헤어지긴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런 트레이시(마리엘 헤밍웨이)는 솔직하고 순수하다. 자신이 느끼는 사랑 앞에 상대방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42살 아저씨와의 관계에서 한계로 작용하는 단점보다,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장점을 더 우선 생각한다. 아이작의 아내 질(메릴 스트립)은 아이작과의 이혼을 소재로 책을 쓰고 있다. 사랑하는 동성의 애인이 있으나 아이작과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아이작의 친구 예일(마이클 머피)은 다정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지만 스스로 그것의 자책감에 옭아매는 인물이다. 사랑하지만, 친구에게 애인을 소개해 준다. 메리(다이앤 키튼)는 예일이 유부남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의 자상함이 싫지 않다. 불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호텔로 이끄는 그의 유혹에 쉽게 빠지기도 한다.
해가 졌고, 몇 시간 후면 내일의 해가 떠오를 것이다. 또다시 저 불 꺼진 고층 빌딩들의 칸칸을 수많은 사람들이 가서 채울 것이다. 저 높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더욱더 깊게 땅을 파고, 이미 지어진 건물도 허물고 새로 짓는다. 그리고 그 안을 수많은 아이작과 트레이시, 예일과 질 그리고 메리가 채운다. 영화 속 어떤 인물의 모습에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들 중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어떤 장애물에 한계를 느끼고 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움을 느끼며, 때로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행하고, 누구에게도 쉽게 터놓을 수 없는 고민을 하며 외로움에 사로잡힌다. 내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첫마디를 건넬지 하루 온종일 골몰한다. 때로 비겁해지고,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헤어짐을 맞이하고, 또다시 끝없는 후회에 빠진다. 맨하탄, 서울. 하나, 하나. 하나 그리고 둘.
그 높은 빌딩에서 내가 속한 층은 얼마나 높은 곳일까. 또 그 층에서 얼마나 넓은 곳일까. 인생이란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고, 확보하고, 확장하는 게 아닌가.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그렇게 내 주변에 벽을 세우기 급급했던 나는 어느새 불안감에 휩싸여 상대방에게 나를 만나면 좋은 것보다, 나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교하기 급급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한 감정과 믿음을 하나도 주지 않는 0에서 시작해, 0에서 끝내곤 했다. 괜히 마음을 주었다가 내가 상처를 입긴 싫으니까. 그렇게 나를 둘러싼 벽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다 보니 내 안에도 맨하탄이, 서울이 세워졌다. 아이작도 그렇고, 트레이시도 그렇고 진짜 못난 사람이다. 쟤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싶다가도, ‘아, 저거 내 모습인데’싶다.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우디 앨런의 모습이 코믹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한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트레이시가 아이작에게 말한다. “사람에게 믿음을 좀 가져요.” 우디 앨런이 자신의 치부를 이렇게 풀어내는 이유일까. 나도 사람들을 믿고 내 치부를 드러내 볼까. 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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