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Amants Du Pont-Neuf, 1991
196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새로운 물결(new wave)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는 영화의 주제나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이었다. 영화 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썼던 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등의 인물들에서 시작된 경향은 카운터 시네마적 실천으로 세트가 아닌 야외 촬영, 비전문 배우의 기용, 관객 동일시를 방해하는 의도적인 거리 두기 등이 있었고,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자크 드미, 아녜스 바르다 등 당대의 인물들과 그들이 만든 작품들을 포함하는 말로 쓰였다.
시간이 흘러 TV의 보급과 함께 극장을 찾는 이들이 점차 줄고 누벨바그의 운동 기수들의 빛도 조금 바래던 1980년대에 새로운 이미지(new image) “누벨 이마주(Nouvelle Image)” 혹은 “시네마 뒤 룩(cinema du look)"이라는 흐름이 생겼다. 이름에서 간단하게 유추해볼 수 있듯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에 보다 비중을 둔 경향이었다. 트뤼포나 고다르는 물론 비슷한 흐름이었던 헐리우드의 영향도 받았을 이들. <디바>(1981)와 <베티 블루>(1986)의 장 자크 베네, <마지막 전투>(1983), <그랑 블루>(1988) 그리고 <레옹>(1994)의 뤽 베송,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와 <나쁜 피>(1986) 그리고 <퐁네프의 연인들>(1991)의 레오스 카락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실 “누벨 이마주”라는 건 국내에서 그들의 매니아층에서나 쓰이는 말이지, 세계 영화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이긴 하다. 이름이 비슷하여 누벨바그와 같은 위치에 나란히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이름 정도로만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어린 시절 시네마테크에서 독일의 무성 영화에 빠졌던 레오스 카락스는 그 감각을 자기 영화에서 유감없이 보여줬다. <나쁜 피>에서 대사가 많지 않은 흑백 이미지 안에 딱 무엇이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몽환적인 것들을 담아내기도 했으며,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아네트>(2021)로부터 9년이나 전에 만들어진 그의 최신작 <홀리 모터스>(2012)에선 영화 전반적으로 그러했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미 십 대부터 영화잡지에 비평을 기고했으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만든 두 영화로 자신의 천재성을 알렸다. 자연히 세 번째 장편인 <퐁네프의 연인들>에 대한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레오스 카락스는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퐁네프 다리에서 영화를 꼭 찍고 싶어 했다고 한다. 촬영을 하려면 다리를 통제해야 했고 당국에선 이를 거절했으나 그에 대한 기대가 커 많은 이들이 당국에 호소했고, 마침내 3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락받았으나 레오스 카락스는 실제 영화의 5분 정도 남짓한 분량밖에 촬영하지 못했다. 결국 제작진은 이와 똑같은 세트를 만들기로 했으며 그러다 보니 제작비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고 2억 프랑에 육박하는 돈이 투자됐다고 한다(90년대 기준 1프랑은 약 200원). 과정에서 두 명의 제작자가 파산했고, 레오스 카락스를 지원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도 그에 대한 이견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이목을 집중시키며 만들어진 영화가 막상 개봉하자 평은 상반되게 나뉘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렬하게 펼쳐지는 이미지들 속 처음 나오는 대사는 “또 알렉스야”라는 노숙자 관리인의 것이었다. 데려가서 씻기고 밥도 먹이고 내보내면 또 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알렉스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레오스 카락스의 페르소나 드니 라방이 앞서 같은 이름의 캐릭터로 활약한 두 영화에 이어 다시 한번 출연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레오스 카락스의 초기 3편을 일컬어 ‘알렉스 3부작’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사실 알렉스는 레오스 카락스 자신의 본명이다. 알렉스 크리스토페 뒤퐁, 레오스 카락스를 언급할 많은 일들과 시간이 있었음에도 아직도 생소한 그 이름.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는 그의 이름 알렉스(Alex)와 오스카(Oscar)를 섞어 만든 예명이다. 레오스 카락스는 자신의 이름을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에게 붙인 셈이다.
드니 라방이라는 배우는 마스크부터 압도적이다. 키도 작고 거친 피부에 웃는 얼굴조차 호감이 가지 않는 얼굴. 영화 안에서 그가 연기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태로운 캐릭터들. 드니 라방은 잠시 카메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곧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 그 폭풍의 눈 안에 그를 따라 들어가게 될 것 같은 불편함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에게 이입을 하게 하는 대신 철저하게 대상화하도록 한다. 그는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이자 곡예사 알렉스를 연기했다. 그런 그의 곁에서 호흡을 맞추는 배우는 무려 줄리엣 비노쉬 정도는 돼야 하지 않았을까. 어느 누가 드니 라방의 옆에서 그와 준하는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을까.
미셸(줄리엣 비노쉬)의 시력은 점차 사라져 가는 중에 있다. 화가인 그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 아니었을 테다. 미셸은 시력을 잃기 전 사랑했던 줄리앙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뒀다. 시력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크게 자리하고 있는 와중 알렉스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공사로 사람들의 통행이 금지된 퐁네프 다리 위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외로움뿐이었다. 미셸은 알렉스의 꾸밈없는 감정 표현에 끌려 그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아마도 그의 삶에서 자신에게 곁을 내어준 유일한 인물이었을 미셸에게 알렉스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레오스 카락스는 그것을 대사로써 표현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격정적인 몸짓으로 말한다. 전작 <나쁜 피>에서 알렉스가 데이빗 보위의 <Modern Love>를 따라 거리를 내달리는 충격적인 장면처럼 말이다.
“너는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형상이 될 거야.”
“벌써 작은 건 보이지 않아. 너의 미소는 참 아름다워.”
“하지만 그렇게 작은 미소는 이제 보이지 않아. 크게 웃어줘. 날 위해 모든 걸 크게 해 줘.”
알렉스가 느낀 것이 사랑이라면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괴성과 몸짓, 전력을 다한 질주로써 말하고, 미셸에 대한 원망은 폭력으로써, 미워하지만 사랑해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건 자신의 손을 총으로 쏨으로써 나를 파괴해야 함으로써 말한다. 알렉스의 옆에서 미셸 역시 언어의 장벽을 허문다. 레오스 카락스는 언어에 대한 불신에 대해 말했다. 언어란 진실을 감추고 조작하는 의미 없는 기호라고. 이를 테면 내면의 감정을 언어를 통해 표현하려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정돈되고 수정된다는 것이다. 후에 그는 <홀리 모터스>에서 영화 내내 그 기호를 비틀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면 우리는 이 한계의 양쪽 측면을 생각할 수 있어야 (따라서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언어(문장)의 뜻있음이란 언어가 세계의 어떤 현실을 ‘말할 수 있음’이라 봐야 한다. 그는 뜻있는 문장이 현실의 가능한 ‘그림(도는 모형)’이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의 몸짓뿐 아니라 미셸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렘브란트의 작품인 자화상 역시 그렇다. 렘브란트 이전, 1669년 렘브란트가 삶을 마감하기 전 자화상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표현했던 화가는 적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담은 것 이상으로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의 모습을 자서전처럼 남겼다. 1656년 파산 선고 이후 끼니마저 해결할 수 없는 힘든 삶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은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끝없이 침잠했을지도 모르겠다. 한스(클라우스 마이클 그러버)를 따라 개구멍을 통해 들어간 루브르에서 처음 마주한 그림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이었다. 밧줄도 끊어지고 얼마 남지 않은 물과 식량 때문에 피바람이 분 모습. 하지만 미셸은 그 그림을 그냥 지나친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일 아침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그게 만일 나라면 난 구름은 검다고 대답할 거야.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거야.”
하늘이 하얗고 구름은 검은 세상. 적어도 지금 이들이 주류가 되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낮 대신 밤이 영화의 주 무대가 된다. 온 도시가 잠든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둘의 무대. 서로를 감싸 안아주는 팔이 있어 딱딱한 돌다리도 푹신한 침대가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정말 서로의 육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둘이었기에, 미셸이 떠나가자 알렉스는 그녀를 떠올릴 매개가 아무것도 없다. 주로 낮에 활동하는 예사 사람들이었다면 반지가 있었어야 할 자리에 알렉스는 총을 쏘고 만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알렉스에게 그가 자신을 절대 보내줄 리 없음을 알기에 약을 먹이고 떠난 미셸. 잃어가던 시력을 회복할 방법이 있다 하여 알렉스를 떠나지만, 시력을 되찾으면 끝난 줄 알았던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뒤늦게 후회한다. 정작 자신을 깨워줬던 건 눈앞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의 알렉스였음을. 하지만 알렉스는 미셸에게 전과 똑같이 사랑할 순 없을 거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남긴 상처를 보여줄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둘은 오랜 시간을 거쳐 크리스마스에 퐁네프에서 재회한다. 눈이 펑펑 내려서 온 세상이, 온 하늘이 하얗게 덮인 날. 그리고 어김없이 낮 대신 밤에 만나 그 하늘의 구름이 까맣게 보이는 때에.
“파리야! 잘 자라!”라 말하며 여정을 떠나는 둘을 배경으로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노래가 멈춘다. 그냥 그렇게 영화가 끝나나 했는데 희미하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다리 위에서 둘이 만나 나눴던 그 사랑을 다시 하게 됐을까. 돌아가야 한다는 미셸은 알렉스의 곁을 다시 떠나지 않았을까. 알렉스는 끝끝내 벗지 않던 벙어리장갑을 벗어 보일 수 있었을까. 여러 조건을 따지지 아니하고 사랑에만 온전히 충실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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