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light, 2016
좋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도, 좋아하는 영화지만 몇 번이나 다시 돌려보기엔 너무 아파 힘든 영화가 있다. 주인공이 힘들어했던 날들, 주인공만큼 내가 아팠던 순간들 그리고 주인공처럼 나도 힘을 얻은 부분들이 모두 동시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2016)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두운 밤 스타(사샤 레인)가 호수에 들어가는 장면은 <문라이트>의 것과 너무 흡사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건, 스타를 보면서는 어떤 위로를 받지만 그래서 몇 번이고 영화를 다시 봤지만, 리틀과 샤이론, 후안을 보면서는 너무 힘들어서 다시 보기 힘들었다.
<문라이트>는 <i. Little>, <ii. Chiron>, <iii, Black>이라는 세 개의 챕터로 구성돼있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보면 한 인물에게 각기 다른 세 가지 색이 입혀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세 사람의 얼굴을 일부분 합친 것이다. 세 챕터의 제목은 주인공 샤이론(애쉬튼 샌더스)의 두 별명이다. 샤이론이 어렸을 적엔 작고 왜소한 체격 탓에 리틀(알렉스 R. 히버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성인이 되어서는 블랙(트래반트 로즈)이 됐다. 그러니까 <문라이트>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 불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문라이트>는 주인공의 성장기가 아니다. 리틀이 샤이론의 유년시절이고, 그 샤이론이 성인이 되어 블랙이라 불렸지만 연대기가 아니다. 시간의 흐름상, 그리고 친절하게 챕터 앞에 표기된 순서상은 그것이 맞지만, 주인공은 스스로 리틀이든 블랙이든 어떤 다른 별명으로도 불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지칭했을 뿐이다.
별명이란 게 스스로 그렇게 불리고 싶어서 짓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샤이론은 원해서 리틀이라 불린 게 아니었다. 블랙이란 이미지의 인물이 되고 싶었는지도 알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에 의해 정해질까. 개인의 생에서 각자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 하지만 때로 내가 속한 사회와 그곳에 있는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때로, 단지 영향을 받는 것을 넘어 스스로 그 틀에 맞추려 노력하기도 한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추기 위해서, 내가 속한 조직이 원하는 모습으로,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등의 이유로. 그런데 문제는 그 결정을 내가 아닌 타인과 사회가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후천적일 것에 그럴 수도 있고, 선천적인 것에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 이를 테면 유대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 검은색 피부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 성별이라는 것들이 그렇다. 후천적이라면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것을 거부하고 바꾸려 한다던가,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해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구도 타인의 정체성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누군가 타인에 대해 그런다면, 반대로 자신에게도 다른 이가 그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테다.
로드무비 형식의 <아메리칸 허니>에선 스타가 겪는 일련의 사건을 보여주며 어떤 혼란을 겪고, 그래서 어떤 성장을 이뤘는지 보여준다면, <문라이트>의 서사는 그렇지 않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샤이론은 스스로 다른 별명으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개의 챕터 사이에, 챕터와 챕터를 나누는 공간에 공백이 있다. 인물이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성년으로 넘어가는 긴 시간이 생략돼있고, 어떤 일들을 겪어 어떤 변화를 맞았는지 알 수 없다. 샤이론의 일생에 있었던 흔들리는 순간들의 파편이 병렬돼있는 셈이다.
<달빛 아래에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는 원작의 제목이 111분짜리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리틀이라 불렸던 어린 소년은 호모라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집단 린치를 당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도망치던 리틀은 마약상 후안(마허샬라 알리)의 창고로 들어가게 되고, 그걸 본 후안은 리틀을 따라간다. 약에 취해 자신을 쳐다보지 말라는 엄마와 부재한 아빠, 부모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집에 비해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고, 이름 그대로의 샤이론을 불러주며, 무엇도 강요하지 않는 후안과 테레사(자넬 모네)에게서 결핍됐던 무엇을 더 확실하게 느낀다. 엄마는 마약에 중독된 인물이지만, 후안은 마약을 팔아 돈을 버는 인물이다.
샤이론이 리틀에서 조금 더 성장한 청소년기, 모든 상황이 더 악화돼있다. 엄마의 중독은 더 심해졌고, 학교에선 철저히 혼자가 돼있다. 1부에서 리틀에게 유일하게 위로를 주었던 후안 역시 죽어 이 세상에 없다. 유일하게 샤이론에게 다가오는 인물은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케빈(자렐 제롬)뿐이지만, 샤이론을 괴롭히는 소위 일진들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시간이 더 흘러 샤이론이 소년원을 오가며 어린 시절 자신에게 다가왔던 후안의 외형을 하고 있다. 왜소한 체격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됐고, 금목걸이와 반지가, 비싼 차가 그를 치장하고 있다. 외형만 후안을 따른 게 아니라 블랙이 된 샤이론은 마약상을 하고 있다. 이젠 누구도 함부로 그를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지만 정작 홀로 있는 매일 밤 침대에서 그는 악몽을 꾼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케빈(안드레 홀랜드)에게서 연락이 온다.
까지가 <문라이트>의 모든 내용이다. 빈민가의 흑인 동성애자 소년에게 벌어진 비극들. 시놉시스만 보고도 예상 가능한 사건들. 하지만, <문라이트>의 특징은 그 소재보단 그것을 카메라에 담고 표현해낸 스타일에 관련한 것이다. 베리 젠킨스는 어지럽고 혼란한 상황 속 샤이론의 심리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관심을 더 두는 건 샤이론이 속한 어지럽고 혼란한 상황 그 자체다. 그저 샤이론의 성격이 소심한가 싶을 정도로 샤이론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 심리에 대해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도 많이 카메라에 담기기도 하는데, 영화를 보는 이는 샤이론과 같은 방향에 시선을 두며 그가 마주하는 시선을 공유하게 된다. 그가 보는 것을 나도 느껴야 된다. 그 어지럽고 혼란한 상황의 압박을.
1부에서 축구하는 아이들 곁에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볼 때, 아이들이 서로 자신의 성기를 꺼내 보이며 비교할 때, 홀로 집에 가고 있는 샤이론에게 패거리 둘이 다가와 위협을 할 때 등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누군가의 시선이 되어 인물들을 죽 훑는다. 핸드헬드로 촬영한 많은 장면들은 영화 바깥에 있는 카메라맨이라는 느낌보다는 모두 영화 속 누군가의 시선이 되어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때로 화면의 가장자리에 포커스가 나가기도 하지만 그건 실수라기 보단 의도된 것일 테다. 사람의 눈도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진 못하니까. 그래서 누군가의 시선이 된 카메라도 놓치는 부분이 있을 테다. 샤이론은 허구적인 인물이겠으나, 지구 상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만 같다. 그 누군가의 시선이란 건, 샤이론의 옆에 있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는 나의 것이 되기도 한다. 다시, 그가 보는 것을 나도 느껴야 된다. 그 어지럽고 혼란한 상황의 압박을.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다. 후안이 입에 담배를 물고 차에서 내린다. 그의 부하직원이 돈이 없는 누군가에게 마약을 팔아달란 요청을 받고 있다. 후안이 부하와 인사를 나누고, 잠시 뒤편에서 담배를 피운다. 후안은 직원에게 잘하고 있다고 독려하고 헤어지는데, 그 앞에 쫓기는 리틀과 그를 쫓는 아이들이 지나간다. 이 상황을 360도로 몇 바퀴나 회전하며 보여준다. 영화에 처음 등장한 인물 후안이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잘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롱테이크에서 얼핏 여유 있는 오후의 모습 같지만 병든 거리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보여주긴 하지만, 또 포커스가 나가 있어 명확하게 볼 수는 없다. 애초에 그 거리의 상황이란 게 그렇다. 그 대낮에 거리에서 마약을 거래하고 있는데도, 약에 중독된 이가 거리를 활보하는데도 그것을 규제하거나 구제할 어떤 시스템도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카메라가 그렇게 인물의 주변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이따금씩 인물을 클로즈업할 땐 폭발하는 에너지가 있다. 2부에서 샤이론이 집단 린치를 당한 다음 날, 학교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담는다. 영화에서 뒷모습을 보여주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학교 건물로 들어가고, 교실로 향하는 동안 몇 차례의 문을 벌컥 연다. 내내 뒷모습만을 담던 카메라는 잠시 샤이론을 앞에서 보여준다. 큰 결심을 한 그의 얼굴에선 비장감이 느껴지고, 그는 자신을 린치한 패거리의 우두머리를 의자로 내리친다. 하얀 옷, 빨간 옷을 입던 리틀과 샤이론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1부에서 후안은 리틀에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가르침을 줬었다. 그리고 그 말이 리틀에게, 샤이론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영화는 보여준다.
I run by this old... this old lady. I was runnin', hollerin'... cuttin' a fool, boy. This old lady, she stopped me. She said... "Running around, catching up all that light.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You blue. That's what I gon' call you. Blue."
- So your name blue?
Nah. At some point you gotta decide for yourself who you gon' be. Can't let nobody make that decision for you.
블루. 샤이론에게 있어 가장 따뜻한 색, 블루. 후안은 리틀에게 수영하는 법도 알려준다. 어린 리틀을 품에 안고 물에 뜨는 법을 알려줄 땐 침례(Baptism) 같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듯, 리틀은 후안으로 인해 보다 떳떳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샤이론은 약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엄마가 오늘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자 테레사에게 향한다. 샤이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른 별명이 아닌 본명으로 불러줬던 테레사는 그가 자고 갈 이부자리를 능숙하게 정리해준다. 샤이론은 엄마에게선 느낄 수 없던 어떤 감정들을 계속해서 느껴왔다. 이 집에 사랑과 자부심 밖에 없다던 테레사는 샤이론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자극한다. 바로 이어서 잠에 든 샤이론을 카메라가 머리에서부터 성기까지 훑고선, 그대로 샤이론이 테레사의 집 밖으로 나가 케빈이 여자 친구와 섹스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장면, 아침에 꿈에서 깬 샤이론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샤이론이 유일한 친구였던 케빈을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케빈이 양성애자였음을 말하는 장면이겠다. 이 장면은 3부에서 케빈에게 연락을 받은 다음 날 블랙이 몽정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2부에서 샤이론이 첫 경험을 하게 될 해변에선 영화에서 전혀 쓰이지 않던 문학적인 대화로 두 인물의 마음이 통하는 장면을 섬세하게 그리기도 한다. 이때 카메라는 둘의 대화를 둘의 얼굴을 번갈아 클로즈업하는 대신 둘 사이를 사선으로 나눠 한 인물이 말할 때 다른 한 인물의 옆모습이 살짝 걸쳐있게 찍었다. 상대방의 숏에 완전히 들어가기엔 아직 조심스러운 이들의 심리를 표현하듯. 그리고 마침내 둘이 한 화면에 들게 됐을 때 둘은 서로를 안는다.
바람 느낌이 정말 좋다.
- 응, 정말 그래.
우리 사는 주변에서 가끔 똑같은 바람을 느낄 수 있어. 이웃을 통해 오지만 모든 게 잠깐 멈춘 듯 찾아와. 모든 사람이 그걸 느끼고 싶어 하니까. 모든 게 그냥 고요해지지.
- 들리는 건 심장박동뿐이겠지. 맞지?
느낌 너무 좋다.
넌 뭐 때문에 우는데?
- 가끔씩 많이 울지 내가 눈물방울이 된 것처럼.
그리곤 바다로 흘러들어 가지? 모든 엿같은 것들이 슬퍼서 물에 빠지듯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영화는 샤이론이 후안의 가르침을 어떻게 새기는지를 철저하게 바라본다. 그것도 거친 핸드헬드 기법으로 바라보는데, 이때의 영상은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럽다. 그것은 곧 주인공의 심정이고 그가 처한 상황일 것이다. 인상적인 건 주인공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마약 중독자인 어머니에, 학교에선 동성애자라고 따돌림을 당하지만 주인공의 주변엔 그를 도와줄 어떠한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을 철저하게 소극적인 자세로 두어 그 시련을 극복하지도, 그렇다고 그것에 굴복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일관시킨다. 관객 역시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태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밖에 없다. 뒷모습을 담는 방법은 앞서 언급했듯 인물과 같은 곳에 시선을 두게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며, 동시에 섣불리 그의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이해한다는 체하지 않고, 그 내면에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음으로써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늠하기 힘든 아픔을 가슴속에 지닌 리틀과 샤이론을, 블랙을 존중하기 위해. 붉은빛을 발할지 푸른빛을 발할지,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이 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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