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mbrellas Of Cherbourg, 1964
자크 드미의 영화를 막 보기 시작했을 때, ‘A 영화에 나왔던 이가 B 영화에 또 나온다.’는 식의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당했던 터라 그땐 몰랐는데, 드미의 영화들을 본 후 다시 보니 영화가 시작할 때마다 소름 돋는다. <당나귀 공주>(1970)에서 공주 역을 맡았던 까뜨린느 드뇌브가 똑같은 분장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쥬니비에브 역을 맡고선 똑같은 노래를 부른다. “내 사랑. 오, 내 사랑.” 으...! 쥬니비에브는 기(니노 카스텔누오보)에게 딸을 낳으면 이름을 프랑스와즈라고 짓겠단다. 아들이라면 프랑스와였겠지. 기와 결혼을 하겠다며 우산가게를 하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장면은 왠지 <도심 속의 방>(1982)에서 프랑스와(리사르 베리)와 결혼하겠다는 비올렛(파비엔 비용)이 떠오르고, 에메리 부인(안네 베르농)의 집에 사는 기의 설정은 펠티에 부인(안나 게일러)의 집에 사는 에디트(도미니크 샌다)가 떠오르게 한다. <롤라>(1961)에 등장했던 세실이 언급되고, 롤랑(마크 미셸)이 다시 등장한다. 롤랑은 <로슈포르의 숙녀들>(1967)의 것처럼 유리창이 커다란 점포를 냈다. <쉘부르의 우산>은 마치 한 편의 영화인 것 같은 50편의 영화를 만들겠다던 자크 드미의 야심이 잘 드러나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시간의 흐름을 구분하는 경계가 씬이나 시퀀스가 아닌 영화 그 자체가 되는 신기한 체험. 마냥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관이 교차하는, 색이 예쁘지만 마냥 행복한 스토리라고는 할 수 없는 영화들. 같은 내용의 반복인 것 같지만 그래서 전작의 느낌을 뒤집는 차기작. 순서를 다르게 해서 몇 번이고 다시 본다고 해도 매번 다른 느낌을 선사할 자크 드미의 세계.
<쉘부르의 우산>에 대한 해설은 오히려 아녜스 바르다 감독님의 <낭트의 자코>(1991)를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낭트의 자코> 그리고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까지 보니 <쉘부르의 우산>에 대한 감상이 더욱 풍부해진다. 어릴 적 자동차 정비공을 하셨던 드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기의 설정. 언제나 노래가 끊이지 않았던 정비소의 풍경이 곧 <쉘부르의 우산>의 분위기가 된다.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벌어졌던 프랑스에게서 독립하려는 알제리와의 전쟁에 참전한 드미의 아버지는 정비공의 경력을 바탕으로 무기를 만드는, 그러니까 참혹한 최전선이 아닌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 배치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인해 2년 간 헤어질 수밖에 없는 기와 쥬니비에브의 절절한 사랑은 마음이 아프다. 분명 걷는 장면이지만 트레일러에 올라타 몸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어색한 트래킹숏은 <쉘부르의 우산>이 그렇게 오랜 영화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을 현대인들이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자크 드미 감독의 세계에서 여주인공들은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와중 사랑하는 이가 떠나간 이후의 삶이 없을 것처럼 슬퍼하다가도 이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인다. <롤라>는 물론, <천사들의 해안>(1963), <쉘부르의 우산>, <로슈포르의 숙녀들>이 모두 그랬다. 그의 영화들이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여도, 결국 모두가 연결되지 않은 독립된 개인임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롤라>의 롤랑이 <쉘부르의 우산>에 나와도, 까뜨린느 드뇌브가 <로슈포르의 숙녀들>을 거쳐 <당나귀 공주>에 나와도, 앞선 작품의 설정이 <도심 속의 방>에 나와도 결국 서로 일치하거나 동일하지 않고, 그가 찬미하는 노래와 춤처럼 삶은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롤라>에서 롤라가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떠나보낸,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롤랑이 세계 각국을 돌며 안정된 사업가가 돼서 <쉘부르의 우산>에 돌아왔을 때, 그는 기의 아이를 임신한 쥬니비에브를 기꺼이 사랑한다. 재회를 약속했던 기가 2년 후 돌아와서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롤라>의 초반부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롤랑의 모습이 <쉘부르의 우산>의 기에게서 반복된다. 하지만 기는 롤랑처럼 떠나지 아니하고,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던 마들렌(엘렌 파너)과 결혼해 아들 프랑스와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
<쉘부르의 우산> 속 연인들은 세상에 또 없을 절절한 사랑을 했지만, 불가피한 이별을 맞았고 세월이 흘러 서로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린 뒤, 운명처럼 우연히 만난다. 그토록 절절했던 둘의 모습을 떠올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서로의 상황을 받아들인다. 이해하고, 용서해준다. 왜 그랬냐고, 왜 기다리지 않았냐고 다그치지 않고, 왜 편지를 쓰지 않았냐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책망하지 않는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둘만 있으면 될 것 같은 뜨거운 사랑을 했으나, 정작 다 무너지고 아무것도 없을 때 안정과 평안을 준 이를 선택한 것을 질책할 수 있을까. 어떻게 기의 아이를 임신하고 롤랑과 결혼했느냐고 그녀를 원망할 수 있는 것일까. 각각 프랑스와와 프랑스와즈라 이름 지은 아들과 딸을 보며 서로를 계속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훗날 진짜 사랑이 무엇이냐고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본 나도 시간이 흘러 다시 봤을 때 또 다른 감상이 나올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은 더없이 아프고, 또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