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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승 Apr 07. 2023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1962

서부극이란 흔히 미국 서부의 미개척지황야를 배경으로 흙먼지 날리는 곳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남성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결투를 펼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역시 다르지 않지만이 영화는 서부극의 클리셰처럼 여겨지는 모뉴먼트 밸리(심지어 존 포드 자신도 모뉴먼트 밸리를 지구상에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마저 등장하지 않고존 포드의 많은 영화들과 다르게 실내에서 많은 장면을 찍었다는 특징이 있다.


노년의 상원의원이자 법률가이면서 외교관이었던 랜섬 스토다드(제임스 스튜어트)가 아내 할리(베라 마일즈)와 함께 서부의 작은 마을 신본에 도착한다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 작은 마을에 방문하니 지역지 기자들이 나서 이유를 묻는다오래전 변호사인 랜섬은 동부를 떠나 서부로 향했다신본 마을 외곽 즈음에서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라는 강도에게 습격을 당한다쓰러져 있던 랜섬을 톰 도니폰(존 웨인)이 발견하고 할리에게 데려와 치료를 받게 한다변호사인 랜섬은 법으로 리버티를 처벌하겠다고 하지만신본의 이들은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마을의 보안관 역시 무능해 힘이 센 리버티에게 휘둘리고 있는 신세였다신본이 주 편입(statehood)이 되려는 시기에 대지주들에게 고용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했던 랜섬과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지주들의 편에 섰던 리버티가 대결을 하게 된다.


존 포드 특유의 유머가 영화 곳곳에 있고작은 배역의 인물들마저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잘 잡혀있는 와중 일어나는 사건들은 촘촘하게 엮여있다매끄러운 전개에 카메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피사체들 모두가 살아 숨 쉬는 흡입력 높은 영화이다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언급하는 것으로도 많은 페이지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인데누군가 서부극의 대표작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영화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에는 서부극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가 없다지나간 시대떠나간 인물의 이야기는 인물은 부재하나 그가 속했던 장소는 영원하게 남는 경우들이 있다포드의 <역마차>(1939)에서부터같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다호>(1991) 등 많은 영화들의 것을 언급할 수 있을 텐데한없이 높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대신 황량하지만 영원히 그곳에 있을 계곡에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효과를 지니기도 하는 것이 이 영화엔 없다어떤 장소는 단지 배경으로 기능하는 것 이상으로인물을 그곳에 가둬버리게 할 수도 있다퐁네프 다리싼샤 댐그리피스 천문대미스터리 밸리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인물이자배경이자 동시에 시대가 된다.     

영화의 제목인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지칭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진실과는 달리 랜섬이 아닌 톰이었단 건 단순한 반전을 넘는 의미를 갖는다마을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던 리버티 밸런스를 쏨으로써 자유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리버티처럼 마을 사람들을 억압하진 않았으나역시 사람들로부터 보장받는 그의 위치가 리버티에 대항할 존재로서의 힘에 기반한 것이었다서부개척시대는 가고헌법에 기반한 현대 사회의 기틀이 잡혀가는 과정에서 랜섬은 리버티를 총으로 쐈지만리버티가 먼저 랜섬을 총으로 쐈기에 정당방위로서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리버티를 쏜 것은 톰이었고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랜섬은 마을 사람들에겐 눈엣가시였던 리버티를 처리해 준 존재가 됐을지 몰라도 명백한 살인자가 되는 셈이었다톰은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것임을 인지했는지도 모르겠다리버티를 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영웅적 대우를 받는 것 대신모든 것을 혼자 떠안고 떠남으로써 사랑해 왔던 할리를 포기하는 대신리버티와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있었던 자신의 존재를 포기함으로써 신본에 자유의 균형을 가져온다.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하비 덴트에게 고담을 맡기고 사라진 브루스 웨인 같은 서사로 볼 수 있겠다마초적이지만 어쨌든 사내들의 우정을 다루는 서사로 볼 수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의 이 장면에서는 사라질 배트맨이 입은 수트보다 미래를 책임질 하비 덴트의 수트에 의미를 두고 싶다총과 힘으로 대표되는 리버티와 톰과 달리 랜섬은 생전 총을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인물이었다총 대신 법률서로 사람들을 지키고자 했던 이가 결정적 순간에 입고 있는 전투복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릴이 달린 새하얀 앞치마였다부상을 당해 신본에 도착한 그는 할리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간호를 받는 대신 주방에서 설거지를 돕는다자신이 받은 도움에 끝까지 보답하겠다던 그는 리버티와 대면하는 순간까지도 앞치마를 입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베어 문 이후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페넬로페와 이몽룡을 기다리는 성춘향을 언급할 그 오랜 세월 하얀 앞치마는 여성의 것이었는데그것이 카우보이들이 등장하는 서부극에서 뒤집힌 셈이다리버티가 마을 사람들의 대표가 되는 데엔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으나그가 총에 맞아 쓰러졌을 때엔 역시 총상을 당한 랜섬은 모두 지나쳐 그 주검을 확인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랜섬을 기다리는 건 역시 앞치마를 두른 채 기다리고 있는 할리였다둘을 뒤로하고 술에 취해 집에 도착한 톰은 할리와 함께 살려고 생각했던 집에 불을 지른다흑백 영화여서도 그렇겠지만검은색의 방에 불을 켜니 하얀색이 번진다램프에 불을 켜니 어두움을 밝음이 밀고 퍼져 나아간다까만 필름에 빛이 지나가며 영화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불과 1/15초에 해당하는 생성과 소멸의 순간서부개척시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오는 순간이 있다.


영화는 플래시백을 마치고 다시 초반부로 돌아온다랜섬은 기자에게 자신이 신본에서 겪은 일을 들려준다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실과 다른 사실을 말했으나 기자는 여긴 서부예요. 전설이 사실이 될 때그 전설을 기록합니다.(When the legend becomes the fact, print the legend.)”라며 랜섬에게 들은 것을 기사화하지 않겠다고 한다긴 시간의 플래시백을 통해 관객과 기자는 사실을 알게 됐으나이 사실이 지금의 전설을 바꾸진 못한다톰의 장례식(사실 이게 장례식인가 싶기도 할 만큼 초라한데)엔 그가 누워있는 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아마 지금 신본에 살고 있는 이들 중엔 톰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그럼 이 플래시백이긴 시간의 영화가 무의미해지는 것일까나는 모뉴먼트 밸리를 과거의 신본이 대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플래시백을 다시 플래시백해 보면, 톰은 부상당한 랜섬을 데리고 천천히 마을에 들어온다영화의 마지막 즈음 그가 집에 불을 질렀을 때 구조되어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인 장면이다동부에서 온 이 법률가를 보고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직감했던 것이었을까플래시백을 통해서도 제자리걸음인플래시백의 플래시백을 거듭하며 톰은 그 신본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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