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tress, 2017
내린 비에 꿉꿉함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그럼에도 나는 행선지로 향해야만 하는 와중 흐르는 땀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별 것이 다 사람 무기력하게 만드네.’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관람하는 것 자체가 무기력했던 경험이 떠올랐으니 바로 <남한산성>이었다.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으로 도주해 있을 때, 차디찬 겨울바람은 백성들의 살갗을 아리게 했고, 오랑캐들은 산성으로 통하는 통로들을 모두 막아서선 조선이 무릎 꿇지 못하곤 버티지 못하게 했다. 영화의 제목이 병자호란이 아닌 남한산성인 이유는 남한산성이라는 장소 자체에 의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훈련받은 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저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으로 차출된 백성들은 그저 영상 김류(송영창)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전장으로 떠밀려 나간다. 백성들은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정작 그들을 죽인 건 그들이 어떤 명령을 내리는 지도 모른 채 전장으로 내몬 조정 대신들이었다. 감독이 공들여 찍은 것처럼 보이는 전투 장면은 액션 자체로의 의미보다는, 그렇게 의미 없이 죽어나가는 목숨들을 보며 무엇도 할 수 없는 관객들에게 무력감을 주는 것에 존재 이유가 있어 보인다.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이 인조(박해일)와 조선을 진심으로 생각하며 주장을 펼칠 때, 그것을 듣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영화 안에선 임금이겠지만, 현실에선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이다. 식량이 부족하다는 신하의 말에 “아껴서 먹이되, 너무 아끼지는 말라.”같은 애매모호한 말 대신 나는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봄에 씨를 뿌리고 그것을 가을에 수확해 겨울을 잘 보내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들에게 먹일 식량이 없고, 얼어가는 손발을 따뜻하게 데워줄 가마니조차 없는데 사대부의 명분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현대에 와서 인조와 두 충신을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보는 것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끝에 이르러 상헌은 명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은 모든 낡은 것들이 사라졌을 때 열릴 수 있다.”고 했다. 영화는 끝이 나게 되어있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퇴장했으나,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겐 무엇이 낡은 것이고 사라진다면 어떤 방법이어야겠는가. 살아 있다는 존재로서 나는 어떤 새로운 말,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삶을 통해 본질을 찾나. “나는 살고자 한다.”는 인조의 말은 말 그대로 산다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인가. 나는 오늘 어떤 씨앗을 심어 어떤 생각을 틔우고자 하는 것인가. 낡은 것이 사라지기만을 바라고 있는 나는 새로운 길을 잘 열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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