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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승 Jun 15. 2023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Small, Slow But Steady, 2023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하니 아직 화면에 무엇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 사각사각 연필소리가 들려온다볼펜도만년필도 아닌 연필만이 주는 느낌이 분명 있다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복서 케이코(키시이 유키노)는 하루 간 진행한 훈련과 그날의 생각들을 노트에 옮겨 적는다. 1945년 종전 이후부터 운영된 낡은 체육관에는 녹이 슬어 소음을 내는 기구와 군데군데 떨어진 나무자재들도 보인다. 2019년 12월을 배경으로 시작한 영화는 곧 닥칠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포함해 지나가는 시대의 것들을 필름에 포착한다초단위로 긴박하게 상황이 펼쳐지는 운동을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는 훈련마저도 비장애인들에 비해 더딜 수밖에 없다코치는 먼저 자신의 몸으로 시범을 보이고케이코는 눈으로 그것을 좇아 따라 하는 식이다하지만 다른 감각기관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몸은 지쳤을지언정 케이코의 눈은 항상 또렷하다동일본 대지진에서 비롯했든일본의 오랜 불황에서 그랬든허무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꼭 일본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시야 유야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짙은 블루>(2017), 토미나가 마사노리의 <호박과 마요네즈>(2017),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과 미야케 쇼의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를 포함해 최근 일본의 영화들에서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는 분위기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도 그렇지만 이 영화들은 영화 안에서 러닝타임이 끝났지만 서사가 그 지점에서 끝나진 않는 것처럼 보인다다음을 기약하며 세이치(나카노 타이가)와 헤어진 후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츠치다(우스다 아사미)의 모습아사코(카라타 에리카)와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에게 끝내 답을 듣지 못하는 “(에모토 타스쿠)가 있었고잠시 헤매이긴 했으나 이내 오늘도 달리기를 시작하는 케이코의 모습이 그랬다저마다의 삶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니 무엇을 할 때어떤 상황에서 행복한가에 대한 기준 역시 다 다를 것이다꼭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 수 있고그 목표란 것 역시 장기적인 관점이 아닐 수도 있을 테다투잡을 뛰면서도 하루쯤 쉬어도 될 법 한데 스스로 게일러질까 두려워 오늘도 달리는 느리지만 정직한 케이코에게서 나 역시 오늘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너의눈을들여다보면 #키시이유키노 #미우라마사키 #마츠우라신이치로 #미야케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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