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le in Seoul, 2023
“난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보다는 내가 강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해질 거야. 어른이 되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난 지금까지는 그럴 수만 있다면 열일곱, 열여덟인 채로 있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니까.”
영화 속 등장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구절이다. 얼핏 봐도 어리숙한 이야기가 남얘기 같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누군가 나에게 더 어른처럼 행동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누군가 나에게 더 강해지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나는 옆에 있는 이보다 내가 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 딴엔 내가 알려주고, 내가 감싸주고, 내가 잘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에게 그걸 요구한 이는 없었다. 혼자 있을 때처럼 같이 있어도 얽매이는 기분이 들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잘 모르겠다.
혼자만의 공간에 혼자만의 기준으로 정리를 하다 보면 바닥엔 먼지 한 톨 없고, 창문엔 손자국 하나 없을 것 같지만 또 그렇진 않다. 과거의 어떤 트라우마는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방어기제로 작용하는데, 애써 나에 대해 설명할 필요 없이 코드가 맞거나, 혹은 그 문을 열어달라고 노크를 하지도 않는데 왜인지 내가 먼저 그 문을 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사랑에 빠지는 건 한 순간이다. 영호(이동욱)가 어느 사이엔가 현진(임수정)에게 끌리고 있는 건 전혀 갑작스럽지 않았다. 둘이 달빛을 배경으로 와인을 마시다가 마음이 열리는 기분이 들자 영호는 현진이 술에 취해 이러는 게 아닌지 오히려 조심하지만 현진은 자신의 마음에 충실히 직진한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지나치게 조심만 하다 보면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나는 이십 대 초반엔 술자리도 참 열심히 찾아다녔다. 불러주지 않았는데도 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러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영화를 열심히 볼 때엔 ‘이 시간이면 영화 두 편은 봤을 텐데’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나 스스로를 혼자로 만들고 있었다.
“혼자가 되면 비로소 보인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영호는 대학 시절 호텔에서 알바를 하던 중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첫사랑 주옥을 만났다고 기억한다. 주옥이 영호가 읽던 책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흘렸던 것과 함께. 하지만 사실 하루키의 책을 읽고 있던 건 주옥이었고, 만화책을 보고 있던 영호는 그런 주옥을 따라 소설을 읽었던 것이었다. 나 자신을 알기도 벅찬데 타인에 대해서는 더 그러기 쉽지 않기 마련이다. 그때의 오해는 기억의 왜곡을 낳았다. 때로 나 혼자서는 진실을 왜곡하기도 하니 함께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끔 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기도 하다.
영호가 글을 쓰고 싶었던 건 그때 주옥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옥과의 연애가 실패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글도 실패라고 여겼을 것이다. 11년이란 세월이 흘러 드디어 “전부터 하고 싶었고, 이젠 할 수 있을 거 같아서.”라는 말을 하게 된 건 그간의 상처를 낫게 하는 현진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을지.
“나랑 딱 맞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걸 맞춰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말 그대로 맞춰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까. 영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에세이를 썼지만, 앞으로는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일에 대해 소설을 쓰기로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관계도, 삶도 그렇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까. 영호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관계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진정한 혼자가 되길 바란다."
#싱글인서울 #이동욱 #임수정 #이솜 #박범수 #영화
미도리가 술에 취해 계단을 헛디딘 탓에, 우리는 하마터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카페 밖으로 나가자, 하늘을 엷게 뒤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거리에는 해 질 녘의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와 미도리는 그런 거리를 얼마 동안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녔다.
“널 만난 덕분에 이 세상에 약간 적응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