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ld Roomer, 2023
인테리어를 하는 목수 기홍(박기홍)은 얼마 전 아영(이소정)의 피아노 학원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서울 근교의 주택에 세 들어 사는 그는 집주인 부부 정환(안주민), 현정(전길)과 이따금씩 술 한잔 기울이거나 운동을 같이 하며 지내고 있다. 기홍이 정환과 장을 보러 가려는데 자신의 스타렉스 천장이 움푹 내려앉아 있어 빗물이 고여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블랙박스를 뒤져보다 피아노 학원 공사를 하던 어느 날 밤 노란 머리의 어떤 사람이 차 위로 떨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용의자를 찾아 나서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전부다.
영화의 첫 장면, 함께 일하는 경준(최경준)과 술 한잔 후 피아노 학원으로 들어가다가 기홍은 경준을 무언가에 놀라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장난임을 밝힌다. 장난기 다분하고 외향적이고 뭐 그런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이 영화 안에서 기홍이 보이는 어떤 감정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감정선은 더 있다고 할 수야 있겠지만, 기홍은 이 장면 이후로 웃지도 무언가에 놀라지도 않는다.
영화의 오프닝, 엔딩크레딧은 새하얀 화면에 까만 자막이 새겨져 있다. 반대의 경우가 보통인데 이는 꿈이나 죽음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오프닝 이후 한 줌 빛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기홍이 들어온다. 그대로 느와르가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나 그 뒤로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사건도 펼쳐지지 않는다. 옥탑방에 살며 건너편 건물에 사는 젊은 남녀의 침대 위 모습을 훔쳐보기나 하던 기홍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정환네 부부의 주택으로 이사한 가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팬티바람으로 집 밖을 다니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이던 그는 그럴듯한 캠핑용품으로 정원을 꾸며놓고 SNS에 <니체의 말>을 읽는 체 게시물을 올린다. 콧방귀를 꼈다. <니체의 말>의 책장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 대한 평판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기홍은 철저하게 보여주기식이었다. 역시나 SNS에서 봤을 법한 안경이나 패션도 허세가 가득한 기홍은 영화의 포스터에 써있는 "당신도 나처럼 이상하잖아요."를 연상하게 한다. 기홍이 악인은 아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이다. 점심은 사내식당이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요기하고 저녁엔 오마카세에 간다는 뉴스가 다른 나라의 일은 아니니까.
<괴인>에서 중요한 건 <a Wild Roomer>라는 영어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공간인데, 기홍이 SNS에 올린 그 모습과는 대조되는 그 외의 모든 모습들이다. 기홍이 작업하는 공사 현장에는 제때 정리하지 않아 제대로 걷기도 힘들 만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목재들은 썩어있고 바퀴벌레가 기어 다닌다. 친구 경준이나 같이 작업하는 인부들에겐 갑자기 반말을 하거나 언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아영 같은 여성들에겐 한없이 상냥하다. 마트에서 처음 본 임산부에게 순서를 양보하기도 한다. 그의 스타렉스엔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구매한 장비들이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남은 공간엔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장편 영화를 감당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이제 초반 20분이 넘도록 아무런 일도 펼쳐지지 않는 동안 소개된 남은 공간은 정환과 현정이 사는 주택이다. 기홍이 사는 곳은 본채와 독립되지 않고 2층이 연결된 방식이다. 딱히 노동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냥 이미 돈이 많은 정환에게 기홍이 내는 세가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샛방에 들이기 전 면접 비슷한 자리도 있었을 것이다. 그저 반려견 정도의 역할로 데려온 느낌이 들기 시작한 순간엔 이충현 감독의 <몸 값>(2015)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하며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작 이 집에서 반려견으로 있던 개는 주인인 현정이 귀가하자 매섭게 짖는다.
이후 우연히, 정말 우연이라는 말 말고는 표현할 수 없는 우연으로 기홍은 블랙박스에 찍혔던 하나(이기쁨)를 찾게 되는데, 정환은 그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한다. 같이 밥이나 먹을 겸. 기홍이 어떻게 이 주택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이런 대수롭지 않은, 혹은 이상한 이유로 들어왔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기홍은 가을에 주택으로 들어가서는, 이제 겨울에 또 다른 이를 데려오려 한다.
하나는 동물을 좋아한다며 목에 거미 타투를 했다. 어려서 가출을 했고, 이제는 성인의 나이가 되어 쉼터에서 나와 지낼 곳이 없다 보니 피아노 학원에서 몰래 밤을 보내던 하나는 이제 이 주택에 한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하얗고 가녀린 체구에 순진해 보이지만 마냥 그렇게 느껴지진 않는다. 거미도 그러지 않은가. 거미줄을 치고, 그 거미줄은 얼마간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나갈 것이고, 그 줄에 먹잇감이 걸려들길 기다릴 것이다.
다시,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은 새하얀 화면이었다. 영화가 그냥 이렇게 네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으로 맺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이 주택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니, 원래 있었던 정환과 현정은 어떻게 될까. 영화가 시작하며 표면적으로 주인공처럼 보였던 기홍은 사실 그렇지 않았음을 이제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정환과 현정은 부부로 나오지만 부부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홍과 함께 첫 술자리를 가질 때에도 정환에겐 또 술을 마시냐며 핀잔을 주지만 이내 기홍에겐 조금씩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마지막의 바비큐 파티 이후엔 정환 몰래 둘이 집 밖을 나가기도 한다. 핸드폰은 집에 둔 채로.
애초에 정환과 현정은 부부라곤 하지만 현정에게 주도권이 있어 보인다. 현정은 정환이 무직의 상태에서 심심하다며 징징댄다고 한다. 비싼 바이크도, 테니스를 비롯한 취미도 현정의 지갑을 빌렸을 것이다. 현정은 수평적인 듯 수평적이지 않은 부부관계 사이에 기홍을 들였고, 다시 정환은 거기에 하나를 들였다. 현정은 정환과 하나를 유심히 바라본다. 웃는 건지 아닌지 모호한 면이 있는 그녀의 마스크는 극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현정은 늦은 시각 기홍의 방을 찾아가고, 새벽엔 둘이서 외출을 하기에 이른다. 새벽녘에 돌아온 그녀에게 정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침대에 누운 기홍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현정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렇다 할 사건도 없는 영화는 기홍의 작업 현장 같은 상태가 된다. 제때 치우지 않거나, 별생각 없이 공간을 차지한 것들이 제멋대로 쌓이다 썩는다.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긴 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차라리 무너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와 달리 현실은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건데 어쩌면 좋을까. 애매하면서도 혼란한 상황을 전문배우도 아닌데 표현해 낸 배우들이나, 그것을 엮어낸 감독의 솜씨가 훌륭하다.
#괴인 #박기홍 #최경준 #이소정 #안주민 #이기쁨 #전길 #이정홍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