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ker, 2019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대체 영화를 왜 그렇게나 잘 만들어놔서 이후의 영화들을 볼 때 엄격한 기준을 세우게 만들었는가. 히스 레저는 대체 연기를 왜 그렇게나 잘해놔서 이후의 조커에 도전하는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해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게 했는가. 토드 필립스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충분히 좋은 작품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놀란과 크리스챤 베일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엔 못 미치는 것 같다. 반대로, <다크 나이트> 시리즈와 굳이 비교를 하지 않는다면 베니스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만큼 괜찮은 작품이기도 하다. 2005년 배트맨의 이름으로 시작한 <다크 나이트> 시리즈는 분명히 극의 주인공을 배트맨으로 설정하고, 그와 대립하는 “범죄(자)”와의 대립을 그렸다. 그 최대 적수가 조커였고, 그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던 것뿐. <조커>의 탄생을 그린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 <다크 나이트> 시리즈와 연결해서 보면 더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보기 전에 보면 좋을 것이고, 본 후에라도 좋을 것이다.
배트맨의 출발이었던 <배트맨 비긴즈>의 시작에서 브루스 웨인(크리스챤 베일)은 부모 웨인 부부를 살해하고 14년 간 감옥에 수감돼있던 이의 감형 공개재판에 참석한다. <조커>의 하이라이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권총을 소지한 채로. 하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건 브루스뿐만이 아니었고, 한발 늦어 실패하고 만다. 14년 간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던 브루스가 ‘조커’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뺨을 때리며 정의(Justice)와 복수(Revenge)를 구분하라 말하던 레이첼(케이티 홈즈)이 옆에 있었다. 그가 고담시의 영웅이 되어 마약과 가난에 빠진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트를 입은 후의 이야기인 <다크 나이트>(2006)에서 조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다크 나이트>의 시작, 그 엄청난 은행털이 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조커의 부하로, 한 팀이 되어 미션을 수행하면서도 한 치의 고민 없이 동료를 죽이고야 마는 건, 한 명을 죽일 때마다 자신이 갖는 수당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돈에 휘둘리는 조커의 추종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조커는 애초에 그들과 수당을 나눌 생각이 없었고, 모조리 죽이고야 만다. <조커>는 조커가 왜 혼자가 됐는지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타노스 보다도 압도적인 빌런이 조커라고 생각하는데, 이 조커는 <저스티스 리그>로 대표되는 DC 유니버스의 캐릭터이지만, 영화 <조커>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노선을 선택했다. 범죄자인 조커가 주인공이 됐지만, 권선징악을 외치거나 자신들과 함께하자며 회유하는 선한 히어로는 없다. <조커>는 슈퍼히어로를 다룬 영화들 중 최초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최근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작품으로는 2017년 길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018년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있는데, 두 영화를 연결 지어 본다면 <조커>가 어떤 말을 하고자 할지 얼추 예상이 가능했다. <조커>는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으로 길거리엔 쓰레기가 넘쳐나고 퇴치도 어려운 수퍼 쥐(Super Rats)들이 들끓는 황폐한 고담시를 배경으로, 거울 앞에서 웃고 있는 아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아서는 손가락을 양쪽 입가에 넣어 입꼬리를 위로 올려 웃는 상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아래로 내려 울상을 지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혹은 광대로서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려 했을 수도 있다.
놀란의 영화들도 그렇고, 토드 필립스의 영화도 그렇지만, 조커로 수렴되는 이 영화들은 모두 인물과 사건의 양면성을 말한다. 밤이면 수트를 입고 배트맨으로 활동하는 브루스 웨인, 고담의 영웅이 되어주길 바랐던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 악행을 저지르는 조커까지. 다시, <다크 나이트>에서 그렸던 브루스 웨인의 고민과 철학, 동전을 던지며 자신의 운명을 점치던 하비 덴트의 두 얼굴, <조커>에선 아서라는 인물이 왜 얼굴에 광대 분장을 하게 됐는지의 과정을 그린다.
광대 분장을 한 조커. 히스 레저의 것도 그렇고, 호아킨 피닉스의 것도 멀리서 보면 그를 흉내 내는 이들이 쓴 가면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지워져서 희끗희끗해진 분칠이 보이고, 상처도 보인다. 멀리서 보면 웃는 모습의 광대이나, 가까이서 보면 소름 돋게 징그러운 악마와도 같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나,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인물.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은 <조커>에도 등장하는 찰리 채플린의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 up, but a comedy in long shot."을 인용한 말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더없이 위태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떠올려보라, <조커>에선 눈을 가리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장면이 나왔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모든 일들은 그런 것들이다.
광대 짓을 위해 신었던 큼직한 신발은 광고판을 훔쳐 달아난 패거리를 쫓기에 더없이 불편하다. 신변을 위해 총을 소지하라던 동료 랜들은 고용주에게 아서가 자신에게 산거라고 말했고, 30년 전 가정부로 일했던 토마스 웨인에게 편지를 쓰는 페니(프란시스 콘로이)는 말 못 할, 어쩌면 본인도 몰랐던 사정이 있었다. 아서가 사랑에 빠지는 소피(재지 비츠)와의 일화 역시 그러했다. 처음 언급되고, 등장하며 얼핏 보기에 재밌거나, 아서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것이었다면, 밀고 들어가 자세히 보면 모두 비극이었다. 그 비극들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이며 조커를 탄생시키고 말았다.
배트맨과 대적하던 스토리와 달리, <조커>에는 대적할만한 영웅이 없다. 아서 플렉의 세계는 자신을 해피라고 부르던 어머니 페니 플렉과의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고, 둘의 상태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동경하던 건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이 진행하던 토크쇼였다. 아서는 엄마가 “늘 웃으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웃음을 주려고 태어났다면서요.”라며 해피라 부르던 영향으로 가장 유행하는 토크쇼에 나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했다. 그의 꿈은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코미디의 왕>(1983)이 자연히 떠올랐다. <코미디의 왕>에서 로버트 드니로는 토크쇼에 나가길 원하는, <조커>에서의 조커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아서가 사랑에 빠지는 이웃집의 소피와의 첫 만남에서 머리에 총을 겨누는 듯한 제스처는 역시 스코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1976)의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혼란스러웠던 사회 속에서 불안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던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광대 분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과 조커가 내면에 있는 화를 분출하는 것은 <택시 드라이버>의 것과 유사하다.
허나 그것은 분명 아이러니다. 사회가 아무리 불안하고 혼란스러워도, 조커 같은 이에게 희열을, 카타르시스를 느껴 동조하고, 추종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 속 고담시의 시민들은 모두 그를 따른다. 정작 가까이 밀고 들어가 보면, 조커는 정신질환이 있음에도 사람들 앞에선 안 그런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커>의 아쉬움은 여기에 있다. 아서는 123분의 러닝타임 중 75분이 돼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되고, 77분이 지나면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75분엔 병원에서 페니의 서류를 보게 되고, 77분엔 앞서 보였던 소피와의 일들이 모두 망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커라는 인물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니 영화가 끝날 때가 된다. 그때까지의 아서가 겪는 일들이 충분히 이해되고, 때론 공감도 되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에너지가 폭발하는 클라이맥스는 아주 찰나의 것이었다.
아서가 겪은 일들은, 종국에 그것이 망상임을 알게 되는 일들은 부모와, 동경하던 TV쇼와, 사랑했던 이웃 소피와, 직장에서의 일 등등 다양한 사례들을 나열해놓고 차례로 부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하나씩 다시 돌파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도미노처럼 한 번에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만한 정도는 돼야 했다. 조커라는 인물의 특성상 그런 논리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게 오류일 수 있으나, 캐릭터가 그렇다고 영화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 직후 나오는 장면엔 아서가 상담을 받고 있다. 카메라는 아서의 상태를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듯 떨리는 다리와 손을 억제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서는 7가지나 되는 약을 복용하면서도 약을 늘려달라고 요청한다. 미치지 않기 위해. <다크 나이트> 시리지든, <조커>든 하나라도 봤다면 알겠지만, 조커의 내면에 쌓인 분노는 단기간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축적되고 있었으나,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들. 외면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그렇게 두지 않았던 사회. 내내 힘들게 붙들고 있던 줄을 놓아버리니 그때에야 비로소 주목을 하는 사회. 는 사실 그리 새로운 게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말처럼, 현실의 세상이 더 영화 같으니, 지금 내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차라리 코미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드는 지경이니, 이해는 되지만, <조커>만이 지닌 매력은 없다.
<조커>의 2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은 아직까지 없다. 시리즈물이 아닌데, 시리즈물 같다. 속편이 있으니, 지금은 그 세계를 구축하는 거라고, 중간 과정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양면성을 다룬다고 했으나, 비중이 한쪽에만 지나치게 치우쳐졌다. 이미 2~30년 전에 봤던 래퍼런스를 응용이 아닌 답습을 함으로써 매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힘 있게 끌고 가는 건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고, 카메라를 홀로 차지하고 있는 순간도 많았으나 단 하나의 장면도 지루하거나, 앞에 나왔던 장면들과 겹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얼굴이 나오지 않는 뒷모습에서마저, 자신의 날개뼈를 가지고도 그 심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내내 아서의 내면에 축적되고 있던 분노가 얼떨결에 쏜 총을 타고 분출되더니, 고담시 전체의 주목을 받게 된 아서가 조커가 되는 순간은 꼭 아서 플렉이 아니더라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 않더라도 이 사회 어디에서든 가능했던 모습이기에 더 끔찍하다. 보는 사람의 배경이 어떻든 그 페이소스 짙은 연기를 느끼기에 무리가 없으리라. 앞서 언급했던 그 많은 것들을 다 무시하고도, 단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라도 표 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내가 감히 어떤 미사여구로 표현할 수 있을까. 찬탄해 마지않는 그 수준은 그가 주연한 포스터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이다. 아서 플렉의 얼굴에서, <그녀>(2013)의 테오도르가 보이는가? <이레셔널 맨>(2015)의 에이브와 체중 차이는 얼마나 날까? <글레디에이터>(2000)에서의 미소년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
오프닝 직후 상담 씬에서 아서가 웃는 게 웃는 거 같지 않음을 처음 느꼈을 때,
고용주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바로 직후 쓰레기 더미에 화풀이를 하는 역광에서,
내내 음침하기만 했던 계단에 처음으로 햇빛이 찬란하게 드는 슬로모션에서,
소름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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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미 말렉이 남우주연상을 받는 데 의문이 크게 들었었다. ‘한 해를 통틀어서 그 연기가 최고였나?’라는 의문은 여전한데, 개인적으론 그 자리에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호아킨 피닉스가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푸념을 덧붙이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재미를 위해 보기엔 올해 개봉작 중 최고가 아니었나.
<다크 나이트> 시리즈 정주행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