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OTHER CHOICE, 2025
“쉰아홉, 쉰여덟, 쉰일곱”
“올라가 줘. 내려가지 말고.”
“하나, 둘, 셋... 예순.”
예순이라는 나이가 멀지 않은 만수(이병헌)는 ‘올해의 펄프맨’상까지 받으며 제지회사에서 승승장구했지만, 25년의 경력을 뒤로하고 실직됐다. 3달 안에 재기하겠노라 다짐하던 그의 발버둥이 1년이 다 되어가자 아내 미리(손예진)가 살림살이를 줄이려 하지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계 사정과 만수 본인의 상태에 이르자,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본인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아닌, 경쟁자를 줄이기로 한다. 어쩔 수 없이.
“다 이뤘다”라고 말하며 가족들을 끌어안고 있는 만수의 모습은 대놓고 복선이었다. 신경 써 가꾼 것처럼 보이는 정원은 왜인지 팀 버튼의 <비틀쥬스>(1988)나 <가위손>(1990)의 것처럼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와중 샴페인병을 든 만수를 노려보는 미리나 그런 부모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는 아들 시원(김우승)이나, 왜인지 말을 하지 않는 리원(최소율), 그리고 그 끌어안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고온의 물에 빠져 분해되고 씻기는 펄프 덩어리의 모습과 교차되는 장면은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한 건 만수의 행동이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런 만수를 응원하고 있는 관객인 나였다. “가을아 와라.”라고 말했던 만수에게 정작 가을은 여느 때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을이 됐지만, 그가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성공하고, 그래서 조금은 나아진 겨울을 맞길 바라는 내가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만수가 성공하려면 결국 큰 범죄를 저질러야 하니 말이다. 이성민, 염혜란, 박희순 등이 수준 높은 연기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가 하면, 주인공 이병헌은 아라(염혜란)에게 도망치다가 마침내 차에 올라 거울에 턱밑까지 쫓아온 아라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나, 뱀이 무서워 가슴장화를 신고 나무막대로 바닥을 두드리며 가다가 겁에 질려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처럼, 비교할 데 없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희극적인 요소들을 불어넣음으로써 영화의 장르를 블랙코미디로 변모시킨다. 웃기면 안 되는 장면인데 웃기고, 만수에게 공감하고,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응원하고 있는 나를 보며 모순됨을 발견하지만, 웃긴 건 웃긴 것이었다.
영화는 만수가 세 명의 ‘잠재적 경쟁자’(정작 그들은 만수를 경쟁자로 생각한 적도, 그렇게 될 일도 없어 보이는 이)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세 개의 에피소드를 나란히 보여주는데, 요는 만수가 가장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그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같은 펄프맨들인 경쟁자들을 만나며 만수는 자신과 아내와의 관계, 자신과 아이들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 치통, 치킨, 첼로, 댄스 무도회, 술, 바베큐 등 다양한 요소들을 한 줄기로 잘 엮어낸 치밀함은 이야기에 생기를 더한다.
처연한 건, 만수가 그 모진 일들을 겪고 나서 보니 세상은 AI가 많은 인력을 대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없앨 수 있는 경쟁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좋은가. 미리는 생활고에 아들에게 넷플릭스 정기 결제를 끊으라고 하는데, 영화시장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인가. 펄프맨은, 극장가는, 그리고 수많은 직종의 다양한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직 불투명한 현실에, <어쩔수가없다>고 말하는 듯 영화도 그렇게 끝나고 만다.
굳이 이 일이 아니어도 다른 길이 많을 텐데 끝까지 한 길만 고집하는 범모(이성민)에게 “네가 실직한 게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했는지가 중요했다”라고 나무라는 아라(염혜란)의 대사가 내내 귓가에 맴돈다. 띄어쓰기 같은 건 할 겨를도 없을 지라도 어쩔 수가 없다. 6이길 바라며 던진 주사위가 1이 나왔어도, 돌이킬 수 없다면 이번 칸에서 나의 최선을 다할 밖에. 그리고 다음 주사위를 던질 기회를 기다릴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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