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 of Love. 2025
좀처럼 한국 영화를 보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 왔다. <우리들>(2015)과 <우리집>(2019) 이후 6년 만에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보고서인데, 점차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어떤 지점마다 앞의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게 만들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끔 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뭐, 말로 쓰니 으레 많은 이야기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은데, 영화가 1에서 시작해 10의 지점까지 도달해 끝난다고 가정한다면, 1-2-3>1-2-3-4-5>1-2-3-4-5-6-7>1-2-3... 같은 식이었다. 이 인물은 누구인가, 이 장면은 왜 담겼는가, 이런 대사는 왜 나온 것인가 짐작만 하고 있던 것이 실체가 드러나거나, 다른 이유를 발견하게 되거나, 장면1과 장면2가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영화를 재차 관람하면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처음의 관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근래 만난 한국 영화들에서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윤가은 감독은 얼마간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자제해 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된댔는데, 이래도 안 아파? 이래도?“
아파. 진짜 아프다.
극에는 위기가 있어야 하고, 어떤 사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세계의 주인>은 어떤 사건이 있은 후 피해자들의 모습을 다룬다. 그런데 사실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기까지도 그런 줄 몰랐다. 그저 밝고 생기 넘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 시작은 <고백의 역사>(2025)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점차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드러나게 되고, 관객은 점차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한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깊게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애초에 그것에 저항하기가 어렵다. 다시, 영화는 어떤 사건이 있은 후 피해자들의 모습을 다룬다. 그런데 누가 피해자인지, 어떤 사건인지, 그 사건이 어제의 일인지 한참 전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고, 흘러갔는데 지금 대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당초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어떤 크기든 간에 상처를 받고 산다. 약도 발라보고, 심하면 수술도 하면서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다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흉터는 남을 수 있고, 겉보기엔 멀쩡하더라도 특정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는 남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것 같다. ‘나만 이런 일을 겪나?’ 혹은 ‘왜 하필 그게 왜 나지?’ 그게 아니라면, ‘모두가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다들 그렇게 괜찮아 보이지?’ 아무리 가깝게 지낸 사이라도 ‘내가 이걸 이 사람한테 어디서부터 얼마나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들. 아픈데 아프다고 소리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하는 것 같다. ”윤가은“이라는 감독의 이름에서 이미 신뢰를 얻고 극장에 들어갔지만 영화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많은 지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초 의도했던 바를 진정성 있게 잘 밀고 나아간다. 긴 시간을 가만히 보고 있다 마주한 세차장 씬은 말 그대로 굉장했다. 단편 <손님>(2011)을 제외하곤 초등학생 정도 나이의 어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다가 이제는 성인으로서 혼란했던 십 대를 지나온 배우들이 호연을 펼쳐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윤가은 감독의 전작들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훨씬 더 다층적으로 다가왔다. 감독도 아마 더 깊은 곳까지 밀고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속은 알 수 없지만 맑은 미소를 보이며 ‘괜찮아’라며 용서를 하는 어린아이는 있을 수 있어도, 그것과 동시에 그 상황을 이해하는 건 조금 더 성숙함이 필요한 것이었을 테니까.
영화가 끝나갈 즈음부터는 전에 인물에 대해 이야기에 대해 짐작하거나 추측하던 것을 다 멈추게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고, 지레 짐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를 낳을 수 있는지 봤으니까.
이야기의 소재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느끼며, 그럼에도 감독님의 당부의 말이 있었기에 이렇게 이만 적는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라도 처음 주인이를 만나게 될 누군가의 소중한 경험을 위해. 하지만 그 후엔 기꺼이 서로에게 용기를 건넬 준비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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