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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KIM JI-YOUNG, BORN 1982, 2019

by 박종승

나 92년생 박종승, 공유보다 못났다. 공유만큼 잘생기지도 못했고, 그가 연기한 대현이란 인물만큼 그러한 상황에서 미소를 지을 자신이 없다. 결혼도 하지 못했고, 아이도 없으니 추측만 할 뿐이지만, 크게 틀리진 않을 것만 같다. 같은 남자인 대현에게 이입을 하면서 봤지만, 지영을 분한 정유미 역시 소설에서 내가 느낀 지영의 이미지보단 밝은 인상이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감정적인 걸 제하고 이 책에서 무엇을 읽었나 싶은 의문이 들어 재독 했었다. 두 번의 독서 후 제법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으나, 어떤 대목들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선하다. 김도영 감독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원작의 활자들을 대부분 충실하게 이미지로 구현해냈다. 그러나 ‘온전히’, ‘잘’ 구현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기에, 나는 이미지 보단 활자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시,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내가 감정을 덜어내고 영화적인 무엇을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재관람을 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진 감상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모습이, 그리고 그것에 대해 갖는 생각들이 영화가 갖는 의의 아닐까.


우선 소설과 다르게,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이건 너무 착한 연출이 아닌가 싶었다. 아직 받아들일 준비와 태도가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여전히 무지한 이들을 위해 넘치는 배려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대현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렇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영을 바라보는 대현의 시선엔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 실려 있었고, 부드럽지만 힘없는 미소엔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소설에서 대현은 평일이면 밤 12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고, 아마도 토요일 또한 출근했었다. 퇴근 후 지영과의 대화 대신 씻지도 않고 침대로 직행했을 거란 내 생각보다, 영화의 대현은 꽤 젠틀했다. 힘들어하는 지영을 많이 도와주려 했고, 매일 지영과 대화를 하려 시도했다. 지영을 와락 끌어안는 대현의 모습은 마치 판타지 같았다. 또, 핸드폰으로 사진을 돌려보던 놈들과는 다르게, 집에 있는 아내 생각에 울컥하는 대현의 동료도 있었다. 구시대적인 발언을 하던 지영의 아버지를 따끔하게 혼내는 어머니의 장면은 위트 있기까지 했다. 몰카나 성추행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어떤 장면들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릴 관객의 아픔을 배려하기도 했다. 회의 전 탕비실엔 여직원들이 모여 커피를 탔다. 영화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갈 몇 초짜리 장면일 수 있다. 그 좁은 방엔 여직원들이 가득했지만, 남직원들은 누구도 없었다. 소설에서 지영은 아침에 출근하면 모두에게 커피를 타서 돌렸으며, 식당에 가면 냅킨과 수저를 세팅했으며, 그들의 메뉴를 모두 받아 적어 주문을 하기도 했으며, 배달을 시켜 먹으면 그릇을 치우기도 했다.


몇 장면에선 작위적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러나 소설과 별개로 보아도 많은 장면들에서 울음을 참기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고, <생일>을 볼 때만큼 많은 이들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했던 관람이기도 했다. 지영은 손목에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며 생긴 터널 증후군일까?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든, 육아를 하면서든 그 손목이 멀쩡할 리 없겠지. 스물한 살 이후로 하루도 멀쩡하지 않았던 내 손목이 절로 욱신거리는 장면이었고, 나를 키우며 고생한 엄마의 한쪽 어깨뼈가 더 자란 게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그 자체로 아프고, 슬프기 때문에 그것을 덜어주려는 배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몇 장면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지울 수 없지만, “몇 장면이 작위적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나는 어려서 결혼을 일찍 하고 싶어 했다. 나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이들이라면 모두가 알만큼 아주 확고했던 이 생각이 흔들렸던 건, 200만 원도 되지 않는 당시의 월급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매 순간 힘들지 아니하고,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어린 생각일 수 있고, 지금의 내가 어린것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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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한 명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 만사형통인가? 둘 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뛰어든 동안 아이는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유치원 선생과 베이비시터의 학대 관련한 소식은 소름이 끼친다. 할머니에게 맡긴다? 그렇담 아이가 얼마나 자랄 때까지 맡겨야 하나? 손주에 대한 사랑만으로 감당하기엔 비용도 수고도 만만치 않을 것.


대현과 지영은 대학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래서 번듯한 직장도 있었으나 출산과 육아로 인해 지영만 퇴직했다. 대현은 홀로 돈을 벌어서, 셋이서 살기에 충분히 좋은 아파트에서의 생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대현은 지영을 위해 자신이 육아 휴직할 것을 말하지만, 지영은 자신의 벌이로 예상되는 지출을 다 충당할 수 없음을 말하기에 이른다. 극 중에서 모 인물의 대사처럼, 임신과 출산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가사와 육아는 함께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그걸 잘 아는 대현은 매일, 매 순간 지영을 위했다. 그럼에도 부족했다.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나는 끝없이 반성만 한다. 소설과 영화 모두 온전히 그녀를 위해 병원을 찾아간 대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소설과 영화가 육아에 대해서만 말하는 건 아니다. 몰카, 성추행, 젠더에 대한 인식, 엄마들이 ‘맘충’이라는 꼬리표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현상, 지나온 세대인 우리 엄마의 시간들, 우리 아빠의 헌신들이 담겨있다. 개인적인 감상으론, 연출진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벌어지는 일련의 논란들을 보며 소설에서의 것들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원작 소설에선 대현과 지영이 상담을 받는 의사는 남성이다. 그 의사가 지영의 상담을 마치며, 이 같은 문제가 없을 미혼 간호사를 뽑겠다고 지껄이는 모습으로 소설을 맺는다. 저런 생각을 가진 이에게 상담을 받고 상황이 나아졌다고 생각하게 되는 아이러니. 영화에선 상담의를 여성으로 바꾸었다. 장모님 생신에 워크샵을 떠나는 대현은 지영에게 꼭 택시를 타라고 당부한다. 소설에선 다른 날이었지만, 아침에 택시를 탔다가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라고 지껄이던 기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영화 초반에 쌓은 병원 검사비 35만 원을 마다하던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지영에겐 더 많은 상처들이 있었다. 애초에 상담의의 성별이란 게, 택시 기사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그들이 가진 젠더 감수성이 논란의 여지조차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렇게 소설과 달리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이 아닌, <82년생 김지영과 정대현>이 되어있었다. 덤덤하게, 부담스럽지 않게 그것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공을 높이 사고 싶다. 누구는 정대현이, 누구는 김지영이, 누구는 김 팀장이, 누구는 그런 자식을 둔 부모 미숙(김미경)과 영수(이얼)가 되는 시간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과 정대현>엔 그들이 오롯한 자기 자신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안전하게’ 담겨있었다. 별 의미 없는 소품일 수도 있겠지만, 지영과 대현 부부가 사는 집엔 손이 닿는 곳이라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들이 꽂혀있다. 지영이 국문과를 전공하긴 했어도 그녀와 대현이 그것들을 다 읽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책들도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은 주지 못하지 않았나. 결국엔 식탁에 마주 앉은 지영과 대현처럼, 서로의 역할에 대한 공론화가 더 활발해지길. 서로가 더 많은 대화를 하길.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을 줄 아는 내가 되길. 그런 사회가 되길. 왜,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함께 연대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식의 이분법으로 계속 나누는 한 해결 방식을 찾긴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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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차별이 여전하고 만연한 게 틀림은 아니겠다. 나도 언젠가 그런 언행을 했을 수 있고, 다른 이의 언행을 본 일은 적지 않다.


소설에서 인용한 통계가 있다.

2005년, 한 취업 정보 사이트에서 100여 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채용 비율은 29.6퍼센트였다. 겨우 그 수치를 두고도 여풍이 거세다고들 했다. - 동아일보. 2005. 12. 14.


같은 해 50개 대기업 인사 담당자 설문 조사에서는 ‘비슷한 조건이라면 남성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대답이 44퍼센트였고 ‘여성을 선호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연합뉴스. 2005. 7. 11.


소설은 “‘여성을 선호한다’는 응답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로 문단을 맺었지만, 기사에서 바로 이어 나온 질문과 답변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는 응답은 56퍼센트였다.”라는 구절이었다. 분명 ‘남성’을 선호한다는 답변이 44퍼센트였고, ‘여성’을 선호한다는 답변은 하나도 없었지만, ‘남성이든 여성이든’ 차별 없이 채용하겠다는 의견이 56퍼센트나 있었으나 인용되지 않았다. 한창 가짜 뉴스니, 자극적인 기사니 말이 많은 요즘인데, 자극적인 제목이나 인용되는 통계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해당 설문에는 이러한 사항도 있었다.


‘수도권 대학 출신과 지방대 출신 간 업무 능력에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76퍼센트가 ‘별 차이 없다’고 답했고, ‘이런 차이가 있더라도 신입사원 채용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응답이 80%를 차지했다.

반면, 취업지망생의 경우 80.2퍼센트가 ‘비슷한 성적이라면 명문대 출신이 취업에 유리할 것‘이라고 답했고, ’ 수도권 대학 출신과 지방대 출신 간 차이가 채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응답도 76퍼센트를 차지했다.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배제하느냐에 따라, 또 그것을 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메시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무엇도, 누구도 배제되지 않은 대화가 필요하다. <82년생 김지영>을 검색하면 영화에 대한 얘긴 찾아보기 어렵고, 단 하나의 문장도 읽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말들로 도배돼있다. 지난 22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세상에는 균형이란 게 필요한데, 저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으면, 나는 이쪽으로 당겨야 돼요. 이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져있기 때문에 이쪽을 잡아당기고 있는데, 넌 왜 그것만 해?라고 물어보고 있는 거거든요.”라고 말했다. 내가 한창 미투 운동에 관심을 쏟고 있을 때 누군가 ‘일베’와 ‘메갈’을 언급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묻기에 위와 같이 답한 바 있다.


올해는 유독 은희들과, 김지영들을 위한 영화가 많은 것 같다. 자인을 위한 영화도 있었고, 미영과 지혜의, 기택네의 이야기도 있었다. 문득, 순호와 지우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 ‘좋은 어른’이 되고픈 바람에 질문에 질문이 계속해서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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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너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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