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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나날>

Two Seasons, Two Strangers, 2025

by 박종승

며칠 전엔 눈이 내렸고 그야말로 한겨울이다. 요즘의 한국영화 시장은 어렵기에, 아니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간 상영관은 유독 추웠다. 난방이 아예 가동되지 않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하니 시나리오를 쓰는 각본가 이(심은경)가 보인다. 그녀는 컴퓨터가 아닌 노트에 연필을 쥐고 글을 쓰고 있다. 글씨체도 동글동글하고 연필을 쥔 손을 보니, 내 개인적인 선입견일 수 있으나 <써니>(2011)나 <수상한 그녀>(2013)에서 봤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매력의 심은경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생각이 오가는 와중 영화는 이가 작성하고 있던 시나리오가 영화로 다 만들어진 듯 해당 장면을 스크린 위에 보여준다. 이미 화면이 전환되기 전부터 외화면에서 파도소리가 들리고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여름이었고, 습하지만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아란 하늘이 청량감마저 주었다. 상영관 내의 냉기는 그런 시원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차 안의 뒷좌석에서 자고 있던 나기사(카와이 유미)가 보이는데 차 앞유리엔 하늘의 구름이 비치고, 뒷유리 너머엔 바다가 보였다. 정면에서 그것을 바라보니 왠지 차 안의 연기가 차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신비감을 불어넣었다. 상영관 안의 분위기가 그것을 가중시켰다. 옆 상영관에선 모르긴 몰라도 <주토피아 2>가 상영 중인 것 같았다. 시작부터 굉장한 속도감으로 몰아치는 액션이 두 시간을 가득 채운 영화. 쿵쿵, 콰앙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고 대사도 별로 없고 바람 소리만이 상영관을 가득 채운 영화는 상대적으로 더 비어 보였다. 하지만 그 내용이 빈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나기사는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왜 저기로 향하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살다 보면 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일이 있다. 놀라움과 당혹감이 나를 먼 곳으로 날려 보낸다. 하지만 말에 붙들린다. 나는 말에 갇혀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극장에서 1:1.33의 비율 화면을 얼마 만에 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연필로 시나리오를 적으며 대사도 별로 없는 이 영화는 참 소중했다. 예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따스함마저 느껴졌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일본의 지방으로 여행을 간 이는 각본가로서 말로 세상을 구축하는 일을 하지만, 거꾸로 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좁은 비율의 화면 안에서 인물들은 말 대신 작은 몸짓으로서 메시지를 전한다. 조심스럽게 꿇어앉은 채로 상대방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상대방은 그것에 응한다. 인물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카메라가 그 기능을 해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어제 봤던 <블랙클랜스맨>(2018)은 서로 다른 장면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면, <여행과 나날>은 정적인 화면 안에서 미묘한 움직임, 표정 변화, 목소리의 톤 등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세상을 새하얀 눈이 덮어버린 고요한 밤, 귀가 멍해질 정도의 적막이 느껴질 때는 상영관 안이 조금은 따뜻해진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미야케 쇼는 <여행과 나날>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별다른 사건도 없이 그저 소박한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닌 전기장판과 두터운 이불과 함께 집에서 OTT로 봤다면 중간에 졸도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왜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상영관과 영화가 합심해 새로운 경험을 체험하게 하는 이 순간을 말하고 싶다. 아무리 좋은 환경을 구축해도 집에선 안 되는, 극장은 극장만의 마력이 있다.


이의 영화에서 나기사가 만난 나츠오(타카다 만사쿠)는 파도에 떠내려온 머리가 잘린 물고기의 시체를 보게 된다. 그러나 후에 강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내리는 바다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보러 헤엄쳐 들어간다. 나기사는 웃으며 “더 깊이!”라고 말하고 나츠오는 실제로 물고기가 보인다며 기뻐하며 더 깊이 들어간다. 그렇게 나츠오는 화면에서 사라지고 뭍으로 다시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폭우가 내리고 강풍에 파도도 거세다. 나츠오가 들어갔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후에 이는 모종의 사건 이후 눈으로 새하얗게 덮인 세상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어딘가로 나아간다. 언어에 갇혀 사라져 버렸던 여름날의 바다와 달리, 새로운 언어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겨울의 모습이었다. 말로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지만,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의미가 전달되는 장면이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 <새벽의 모든>(2024)이 다 그랬다. 나는 앞으로 미야케 쇼의 영화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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