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 2019

by 박종승

음. 뭐라고 운을 떼야할지 모르겠다. 모르겠음을 고백함으로써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작해보려 한다. 나 빼고는 다들 좋단다. 그렇다고 ‘너네가 틀렸어. 내가 맞아.’라고 호전적인 태도로 개봉일에 벌써 2차 관람을 한 것은 아니다. ‘너네가 못 본 걸 나는 봤어.’라며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찬 태도도 아니다. ‘내가 놓친 게 있었나?’, ‘내가 피곤해서 졸았나?’라는 의문에서였다. 지난밤엔 조금 더 일찍 잠을 청했고, 좋은 컨디션으로 상영관에 들어갔다. 갔다가 왔다. 눈에 보이는 건 많고, 드는 생각은 많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지난 13일, 이동진 평론가가 진행하는 라이브톡이 편성된 시간표를 선택했다. 개봉일이 16일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조금 더 일찍 보고 싶었다.(평소 이동진 님의 라이브톡은 듣지 않고 시사회 개념으로 이용하는 편이다. 덤으로, 애초에 이동진 평론가가 아닌 여성 평론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있다면 흔쾌히 3차도 시도하겠다.) 첫 관람이지만 기시감이 잔뜩 들었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하게 보였으며, 어떻게 흘러갈지 또한 확실하게 보였다. 내가 느낀 건 ‘이렇게 됐으면 좋겠네.’가 아니라, ‘이렇게 되겠네.’였다. 일련의 과정은 같지만 뉘앙스가 다름을, 부족한 필력이나마 전달이 됐으면 좋겠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이방인이 등장하고, 심지어 나와는 다른 성향의 인물에게 느끼는 어떤 끌림은 굉장히 참신한 것은 아닐 테다. <블루 라군>(1980)으로 대표되는 것이 있었다. 섬과 그림이라는 소재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캐롤>(2015)의 루니 마라를 제치고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탔던 앨리시아 비칸데르를 떠오르게 했다. <대니쉬 걸>(2015), <파도가 지나간 자리>(2016), <튤립 피버>(2017) 같은 것들이 그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캐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은 물론이었다. 극 중 캐릭터의 이름도 그렇고, 친절하게도 그들이 모여 읽는 신화 또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장면이 나오겠네.’ ‘이렇게 되겠네.’라고 느낀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변주는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렇게 됐다.


오프닝, 새하얀 도화지에 선들이 그어진다.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는 자신이 그림을 가르치는 학생들의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하고 있고, 마리안느를 두고 반달 모양으로 둘러앉은 학생들이 각자의 각도에서, 시선에서 마리안느를 그리는 것이었다. 마리안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만,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위치에 따라, 그들이 포착한 포인트에 따라 다른 부분에서 시작점을 보이는 것이 그 오프닝의 특징이었다. 이 영화는 시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 장면 후에 마리안느의 회상으로 플래시백 한다. 누군가의 시점 숏이 이어진다. 제법 파도가 큰 와중 노를 젓는 사내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마리안느의 시점이었다. 카메라는 마리안느의 시점에서 벗어나 마리안느를 바라본다. 그들에게서 잠시 벗어난 카메라의 위치일 수도 있고, 마리안느의 정면에 있던 사공의 시점일 수도 있겠다. 마리안느가 잠시 캔버스가 담긴 상자에게서 시선을 돌린 사이, 높은 파도에 배가 흔들려 상자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역시나 시선을 중요시하는 장면이었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저택에 도착하고,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가 그를 맞아준다. 캔버스가 담긴 상자를 건지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던 마리안느는 쫄딱 젖은 상태였다. 소피가 몸을 말리라고 하고 나가자마자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는다. 벽난로를 중심으로 양 옆에 하얀 캔버스가 자리하고, 정중앙에 불을 가리고서 앉아있는 마리안느의 옆모습을 카메라가 바라본다. 그리 유연하지 않은 나는, 남성과 여성의 관절 구조가 얼마 큼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세는 너무나 어색해 보였다. 영화를 보면서도 어색하다고 느꼈고, 어색하다고 쓰고 있는 지금 자세를 한번 취해보니 더 이상하다. 무지한 나는 성기를 가리기 위한 어정쩡한 무릎의 높이와, 그러면서도 가슴은 실루엣으로 보여야 하는 남성적인 시선으로 가득한 장면이라고 느꼈다.


movie_image (1).jpg


좌우대칭과, 정중앙에 위치한 배우로 보아 나름 신경을 쏟은 장면인데, 나름대로 포장을 해보자면 그런 남성적인 시선으로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다시, 앞서 마리안느는 남성들이 노를 저어 섬에 데려다줬다. 그녀는 수영을 할 줄 알지만 혼자서는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상태다. 엘로이즈 역시 마찬가지다. 수녀원에서 평등함을 느끼며 잘 지내던 와중, 결혼을 앞두고 있던 언니 대신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시집을 가게 생겼다. 마리안느의 아버지가 그렸다는 엘로이즈의 어머니 초상화가 있다. 어딘가 울적해 보인다. 그녀도 엘로이즈 같은 상황에서 결혼을 했을 것이다. 정작 본인도 그게 슬펐고 하기 싫었으면서 엘로이즈도 그렇게 하도록 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 세상이 바라보는 시선, 뭐 그런 것인가. 엘로이즈는 포즈를 취하고 초상화를 그리면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에야 핸드폰을 타고 사진이 전송되지만 그렇게 그림으로 혼사를 치렀을 수도 있기에, 그동안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거부해왔다. 엘로이즈의 어머니처럼, 그 남성 중심의 사회의 틀에 갇혀버리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엘로이즈의 언니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떠나갔단 말인가. 바다에 빠져 물을 잔뜩 먹은 캔버스를 마리안느는 손으로 쓸어낸다. 평생을 그 틀 안에 가둬둬야 하기에 한 번 씻은 거라 봐도 될까.


영화가 시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화가인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한다. 정확히 재보진 않았지만 관찰자의 태도를 취하는 마리안느가 화면을 차지하는 비중이 시선의 대상이 되는 엘로이즈의 것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이 되는 엘로이즈가 극의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심지어 연기에서도 그렇다고 느꼈다. 노에미 메를랑이라는 배우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이 배우가 도대체 이 영화에서 무얼 맡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연기를 하고 있는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가? 그녀가 자신의 연기로써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게 전달되고 있는가? 무지한 내가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121분의 러닝타임 동안 상당 시간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노에미 메를랑의 많은 연기보다 아델 하에넬이 분한 엘로이즈가 처음 화면에 등장한 1분 남짓한 시간의 뒷모습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이 전달되고, 그 뒷모습이 더 훌륭한 연기라고 나는 느꼈다. 오프닝에서 초상화를 보는 마리안느의 회상을 따라가고 있음을, 그녀가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고, 드디어 엘로이즈에 대해 묘사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하기도 하는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마리안느의 제자들도, 관객들도 엘로이즈의 모습을 처음 보기에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첫 관람 때는 아델 하에넬이라는 배우가 <언노운걸>(2016), <120BPM>(2017), <원 네이션>(2018)에서 맡았던 캐릭터가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신선했다.


극 중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몰래 그녀의 초상화를 그릴 것을 의뢰받았다. 기억에 의존해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그녀의 상황이 흥미로웠고, 그래서 그녀가 엘로이즈에게 취하는 시선의 의도가 이해가 됐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두 번째 외출에서, 바람이 심해 얼굴을 반쯤 덮었을 때, 그 가려진 얼굴의 부분 부분이 너무나 궁금했다. ‘어떻게 얼굴이 다 드러나게 하지? 바람이 갑자기 불려나?’ 따위의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마리안느에게 공감하고 이입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바다를 마주 보고 나란히 선 둘의 모습을 담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에 가까운 곳에 마리안느가, 먼 곳에 엘로이즈가 선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러니까 카메라 기준으로 그들의 옆모습을 바라볼 땐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마리안느 너머의 엘로이즈가 보인다. 다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 엘로이즈에게 자신의 시선을, 그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엘로이즈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마리안느는 정면을 응시한다. 다시 엘로이즈가 보이지 않는다. 재치 있는 장면이다. 다시, 영화는 시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movie_image (4).jpg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상대방을 눈에 담을 때마다 내면에 이미지가 축적된다. 영화는 시선을 다루고 있다. <캐롤>을 언급한 김에, 두 영화는 시선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테레즈(루니 마라)는 카메라를 통해 캐롤(케이트 블란쳇)을, 대상을 바로 보고,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을 바라본다. 단지 보여서 보는 것(see)이 아닌, 관심을 갖고 보기(watch) 때문에 발견할 수 있는 미세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 시선이 하나 둘 쌓이면서 인물들의 감정도 쌓일 것이다. 마리안느는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그 수많은 시선을, 수많은 붓터치로 쌓아 올리고, 테레즈는 그 많은 시선들을 많은 필름에 담아 다시 꺼내어본다. 나는 단지 영화를 봤기(see) 때문에 그 감정들을 온전히 보지(watch) 못한 것일까. 변명을 해보자면, 나의 감상을 방해하는 작위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소피가 임신 중절 수술을 할 때, 옆에 굳이 갓난아이가 있다던가 말이다. 굳이...?


아쉬운 점이나 나열하려고 긴 시간을 할애한 건 아니다. 마리안느는 자신의 의도대로 엘로이즈를 봤지만(see), 다시 제대로 보게(watch) 됐을 때, 둘이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서도록 한다. 모델과 화가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둘은 동등한 높이에 자리한다. 마리안느가 의자 밑에 힘들여 단을 쌓는 장면을 굳이 길게 담은 이유가 그것일 테다. 엘로이즈는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마리안느는 그런 엘로이즈를 서서 그리지만 누가 누굴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지 않게 된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착취하지 아니하고, 그 시선이 관음적이지 않게 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나는 <타이타닉>(1997)이 떠올랐다. 화구를 가지고, 무엇보다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손을 섬세하게 그리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 로즈와 잭 사이에 오가는 시선들. 영화는 시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록 잭은 신발까지 다 신고 있었고, 로즈만 나신이었더라도 말이다.


인물이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러하고, 카메라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그들을 착취하지 않는다. 박찬욱의 <아가씨>(2016)에서, 혹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같은 식의 섹스는 이 영화에 없다. 입을 맞추긴 하지만 그 이후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둘의 모습을 담을 뿐이다. 나 여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캐롤>에서 캐롤이 누워있는 테레즈의 파자마를 벗기더니 말하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 본 적이 없어요(I never looked like that).”라는 식의 대사도 없다. 머리는 부스스한 상태로 누워있으니 가슴이 납작하게 퍼진다. 남성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남성의 시선으로 찍은 베드신에선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어떻게든 가슴을 부각하려 여성을 일으켜 세우거나 엎드리게 하는 게 무슨 관례 같은 것이었다. <라이크 크레이지>(2011)에선 그런 장면 대신 섹스를 했음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넣거나, 그런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충분히 좋은 영화인 <폴링 인 러브>(1984) 같은 예가 있더라도, 일단 노출이 된 장면에선 처음이었다. 나의 무지를 다시 한번 의심하며 무작위로 떠오르거나, 검색을 하며 연관 리스트에 뜬 서른 편 정도 되는 영화들의 베드신을 봤다. 없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나신이었지만 그 장면은 에로틱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두 배우의 나신을 착취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에로틱했을 스킨십은 겨드랑이에서였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긴 그 겨드랑이는 다리 사이를 연상시키게 하려는 함정이었을 수도 있으면서, 꼭 그 스킨십이 특정 부위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시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더불어 그들의 연대를 담은 따뜻한 장면도 있었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발레리아 골리노)는 단지 마리안느가 이 섬에 와서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웃음이 난다며, “여기 있잖아요. 웃으려면 둘은 있어야죠.”라며 함께하는 가치에 대해 말한다.


movie_image (2).jpg


그녀가 5일 간 자리를 비운 사이 남은 세 명의 연대는 기다렸다는 듯 시작된다. 보드게임을 하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두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장면이라던가 말이다. 심지어는 하녀 소피가 몸이 불편하니 자수를 두고, 주인 격인 엘로이즈가 요리를 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원래도 엘로이즈가 소피를 대함에 있어 그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부에서 온 마리안느라는 존재를 기점으로 그렇게 전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데미안을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고, 홍상수의 영화를 같이 볼 수 있는, 고흐의 작품 전시에 함께 갈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좋겠다. 웃음이 절로 나는 장면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노에미 메를랑에 대해 더 말하고 싶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왜 노에미 메를랑이라는 배우를 선택했을까? 감독이 배우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일까? 두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나는 노에미 메를랑이라는 배우에게서 전달받은 것이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다. 장면 하나를 언급해볼까 한다. 마리안느는 자신 이전에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렸던 이의 캔버스를 발견한다. 캔버스는 뒤집어져 있었다. 이때 마리안느의 표정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그 캔버스를 다시 뒤집어서 보는데, 엘로이즈의 얼굴이 지워져 있다. 다시, 카메라는 마리안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녀가 느낀 감정은 무엇인가? 소피가 녹색의 드레스를 가져왔을 때 이리저리 들춰보는 그녀의 표정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어두운 방에서 촛불에 의지해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다가 캔버스에 불이 붙고 만다. 마리안느의 클로즈업이 다시 등장한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 심리를 알 수 있는가? 일부러 불을 붙였나? 실수로 불이 붙었나? 무지한 나는 알 수 없었다. 전혀 알 수 없다는 아니지만,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가 항상 따라붙는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두 번 그린다. 처음의 것은 자신이 배운 대로, 교과서대로 그렸지만 엘로이즈의 내면을 보지 못했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그리게 된다. 노에미 메를랑이라는 배우가 선보이는 연기를 두고 어리숙한 인물이 성장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음이라 자위를 해버렸다.


아델 하에넬이 맡았던 어떤 장면을 노에미 메를랑에게 맡겼을 때 어떻게 될까? 세 명이 모여 오르페우스 신화를 낭독하는 걸 노에미 메를랑이 했다면 어땠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온전히 클로즈업을 혼자서 감당해내는 아델 하에넬의 카타르시스를 노에미 메를랑이 선사할 수 있을까? 글쎄.


영화는 1부와 2부를 딱히 구분하고 있진 않지만, 분명한 전환점이 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두 번째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점일 테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뮤즈쯤 되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리고 감독은 그 경계를 허물고, 전복하려 한다. 시선을 누가 누구에게 두느냐를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 이러한 의미를 낳는다. 물론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마리안느를 고용한 것이지만, 어쨌든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위치에 있다. 단지 모델과 작품을 창조하는 인물로도 구분할 수 있다. 현재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셀린 시아마 감독과 아델 하에넬은 연인 관계였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로 인해, 아니 함께 예술의 단계를 끌어올렸다면, 셀린 시아마와 아델 하에넬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나는 이들 사이에 위치한 노에미 메를랑이라는 배우의 쓰임이 너무나 찝찝하다. 심지어 하녀 역을 맡은 루아나 바야미의 존재감이 더 크다. 소피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장면도 있다. 여성 신분으로는 자신이 그린 그림도 제대로 출품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엘로이즈는 여성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끝이란 걸 어떻게 알아?” “그리기를 멈추면.”이라 말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팔, 목, 귀에 닿는 세 번의 터치는 무엇을 의미하나. 성장한 인물을 따라 처음엔 손가락 하나 그리는 것에도 주저하다가 과감한 붓터치를 가져갔음인가? 그게 맞나?


영화는 죽음의 이미지 후에 흰옷을 입은 엘로이즈의 환영을 등장시킨다. 그 하얀 것은 결혼을 암시하는 것인가, 죽음을 암시하는 것인가. 결혼은 곧 죽음이었던 것일까. 두 시간 내내 그 어두운 공간에 촛불, 난롯불, 모닥불에 의지하던 영화에 눈부신 섬광은 낯선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뒤돌아보라”는 외침과 함께 그 눈부신 빛이 화면을 가득 채웠으며,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의 문이 열리니 역시 빛이 한가득 들어왔다.


#타오르는여인의초상 #아델하에넬 #노에미메를랑 #루아나바야미 #발레리아골리노 #셀린시아마 #PortraitofaLadyonFire #영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메리칸 팩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