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색: 블루>

Three Colors: Blue, 1993

by 박종승

블루. 가장 따뜻하면서도 가장 차가운 색. 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혼자가 된 줄리(줄리엣 비노쉬)의 상실감과 외로움, 그로 인한 우울함. 나아가 그것의 치유와 구원에 대한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에 이어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을 내놓더니, 십계명을 다룬 <데칼로그>(1989)를,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모티브로 <세 가지 색: 블루>(1993), <세 가지 색: 화이트>(1994), <세 가지 색: 레드>(1994)를 선보였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필모그래피를 쭉 따라오다 중간에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1991)이 덩그러니 남는다. 보지 않을 수 없겠다.


국가적인 이념을 다루고, 프랑스의 후원을 받아 만든 영화라 자칫 국가주의적인 영화가 아닌가 싶었으나, 역시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영화였다. 자유, 평등, 박애 중 자유에 해당하는 <블루>는 줄리 개인의 서사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사고의 여파로 침상에 누워서, 상실감에, 다른 이들의 연민 어린 시선이 싫어서, 혹은 다른 이유가 됐든 줄리는 남편과 아이의 장례식을 영상으로나마 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몸도 성한 곳이 없는데, 그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에 더 힘겨워한다. 홀로 남은 자신을 책망하기라도 하듯, 자신만 두고 다 데려간 하늘에 원망이라도 하듯 자신을 학대한다.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차단하더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이와 아무런 의미 없는 섹스를 하고, 자살기도를 한다던가 말이다. 그래도 무언가 해소되지 않자, 가족들의 물건과 집을 처분하고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보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와 바람과는 다르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마음의 상처는 쉬이 낫질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녀의 주변에서, 그녀의 뇌리에 보인다. 가까스로 나선 거리에서는 피리를 부는 노숙자는 남편의 음악을 연주하고, 자신의 눈물을 감추려 찾은 수영장에선 딸을 떠오르게 하는 아이들이 무리로 들어오며, 한낱 쥐마저도 자신의 새끼들을 먹여 살리려 아등바등하고 있다. 마치 개미지옥처럼, 줄리가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줄리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으나 죽은 이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뒤늦게 남편의 내연녀가 있었다는, 심지어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을 본 후라 줄리가 사고를 내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기우였다. 줄리가 나아가는 방향은 분노가 아닌 수용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연녀에게 화풀이를 했다면, 또 그것으로 인한 후유증이 있었을 것이다. 죽은 남편을 생각나게 하는 미완의 노래를 완성하는 것은 오히려 직시함으로써 그 시기를 온전히 지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블루>는 끝없는 추락이 아닌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줄리가 완벽한 자유에 이르렀나? 아니, 아닐 것이다. 너무 완벽한 이념, 이상은 오히려 실제 삶과 너무 동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부정이 담긴 현실적인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은 느낌이 컸다. 줄리와 영화는 과거의 아픔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극 중 줄리가 암벽에 자신의 손을 긁어 상처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보호 장치 없이 진행한 실제 연기라고 한다. 당초 보호 장치가 있었으나, 화면 상 너무 티가 나 줄리엣 비노쉬는 맨 손을 벽에 긁어 상처를 낸 것. 키에슬로프스키나 비노쉬나 영화를 위해 이렇게 모든 걸 바치는 이들이 요즘에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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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들은 곡, 짙은의 <사라져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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