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Veronique, 1991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가? 영화를 봄으로써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화려함으로 두 시간을 가득 채운 히어로 영화가 있는가 하면, 구십 분 남짓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를 나누다가 술이나 마시다 끝나는 홍상수의 영화가 있다. 폴란드에 사는 베로니카(Weronika), 프랑스에 사는 베로니크(Veronique). 도플갱어라는 개념을 대입해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고 죽은 베로니카의 이야기. 단순하기만 한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우선 제목에서 “이중 생활”을 빼야겠다. 이중생활이란 흔히 두 집 살림을 하거나, 겉으론 바른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때에나 쓰인다. 호그와트의 학생들이 마법사의 세계와 머글의 세계를 사는 것도 해당되겠지만, 베로니카/베로니크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원제인 <베로니카의 두 개의 삶>이 적확한가? 조금 더 의역해 <두 베로니카의 삶>이 나을까? 나는 영화에 대해 말하고자 하니, 언어를 가지고 씨름하는 대신 <베로니카...>라고 하기로 한다.
1991년작 <베로니카...>를 극장에서 볼 순 없기에 OTT 서비스를 이용할 밖에. 그러나, 지금 나오는 장면이 베로니카의 것인지, 베로니크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알고 싶어서, ‘10초 전’으로 되돌리면 될 테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잘 모르겠다.”이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님이 자신도 모르는 무언갈 이렇게 장황하게 떠들고 있단 말인가? 이렌느 야곱이란 배우는 감독에게 ‘모르겠다.’는 디렉팅을 받고 연기를 하고 있나? 모를 수도 있다. 정말 모를 수도 있다.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내 손에 쥘 수 없는,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보이긴 보이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손에 닿을 것 같은 그런 것이나,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를, 적확한 개념을 모르지만 눈에는 확실히 보이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수식이 길어진다. 부족한 지식과 논리를 채워보려는 발버둥 일지 모른다. 어쨌든, 감독님이 요구한 러닝타임에 온전히 몸을 맡겨보고 싶었다. 바닷물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변에 가닿아 부서지듯, 그 끝이 어디인진 모르겠으나, 그렇게 주욱 밀고 나아가고 싶었다.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계속되자, 내 메모는 ‘베로니’에서 그쳤을지라도 말이다.
<베로니카...>는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만이 선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고, 그 안의 베로니카와 베로니크를 분한 이렌느 야곱이란 배우는 특히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베로니카...>에 등장한 이렌느의 모든 모습이 아름다웠고, 카메라가 담은 이렌느의 모든 신체를 사랑한다. 예쁘다는 말로는 그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할 수 없을 것 같다.’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아름답다는 수식이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키에슬로프스키 감독님이 <베로니카...>를 찍으려 할 때 이렌느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타났는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탄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 감독이 생각했던 앤디 맥도웰, 줄리엣 비노쉬가 아니었더라도 그대로 완벽한 존재이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못해 지나치게 아름답다.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을 바탕으로 빚은, 마치 조각한 것처럼 아름답다. 미의 여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녹색 광선이, 샛노란 햇빛이 채워진 이미지들은 또 어떠랴. 베로니카/베로니크가 입은 의상은 또 어떠랴. 날이 더워지기 전에 빠알간 니트를 꼭 사 입겠다. 그들이 거니는 거리는 낙엽으로 가득 차 마치 릴케가 여기서 시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대지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닌가? 우리의 마음에서 보이지 않게 다시 한번 살아나는 것, 언젠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그것이 그대의 꿈이 아니던가? 대지여! 보이지 않음이여! 변용이 아니라면, 무엇이 너의 절박한 사명이랴?”
베로니카의 첫 키스신을 보라. 비가 추적추적 내린 골목은 <사랑은 비를 타고>(1952), 혹은 <쉘부르의 우산>(1964)을 떠오르게 한다. <데칼로그> 10부작도, <세 가지 색> 3부작도 좋지만, <베로니카...>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최고작, 아니 지금껏 본 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걸작이라 생각한다.
<베로니카...>의 제목에서 언급하는 두 번째의 삶이 불과 영화가 시작한 지 28분 50초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등장한다. 베로니카의 갑작스러운 사망 선고로 말이다. 베로니카의 시선에서, 유족들이 자신에게 흙을 덮어주며 감은 눈은 베로니크의 섹스씬으로 넘어간다. 오래간 눈을 감고 있다가 떠서 눈앞이 흐린 건가 싶은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베로니크의 음모와 유두를 이렇게까지 클로즈업하나 싶을 정도로 가까이서 담는다. 이 장면만 독립적으로 본다면 더없이 섹슈얼한 장면이겠으나, 이 정사는 베로니카의 죽음과 맞닿아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을 바탕으로 빚은 것 같은’이라 했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은 베로니크의 신체는 더없이 에로틱하지만, 동시에 죽은 베로니카의 시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색이 화면에 가득했던 베로니카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베로니크의 것은 너무나 건조하고 차가워 보였다. 우리는 베로니카의 섹스씬도 이미 봤다. 비슷한 자세, 비슷한 구도에서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섹스씬은 둘을 연결 짓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베로니카의 애인이 그녀를 애무할 때 그녀의 시선은 방 안에 걸려있던 자신의 사진으로 옮겨 간다. 마치 베로니크의 사진이 베로니카의 방에 걸려있는 것 같다.
이 영화가 포르노처럼 인식하게 되는 제목이 싫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섹스에 대해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베로니카의 관능미 자체가 이 영화의 전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크게 내는 순간 죽음을 맞이했다. 베로니크는 다시, 베로니카처럼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로서, 아니, 베로니크 독립적으로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존재로서 불분명하지만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베로니크를 사로잡은 그것은 단순히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에서는 아닐 테다.
점화 효과(Priming Effect)라는 게 있다. 먼저 제시된 점화 단어(Priming Word)에 의해 나중에 제시된 표적 단어(Target Word)를 해석하는데 영향을 받는다는. 베로니카의 죽음을 알게 된 베로니크는 쉽게 할 수 있는 예상대로 행하지 않는다. 어차피 절망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며 끝없는 추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아빠를 지나, 마당에 올곧게 서있는 나무를 안쓰럽다는 듯, 위로해준다는 듯, 그 슬픔을 알겠다는 듯 어루만지며 끝나는 엔딩은 그런 의미에서 일 것이다. 껍데기가 벗겨지고, 톱으로 잘려선 수없이 많은 사포질을 당할 운명이지만, 지금 이렇게 서있는 나무를 보며 자신의 운명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님의 다음 작품인 <세 가지 색: 블루>(1993)의 정서와 많은 부분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블루>의 줄리(줄리엣 비노쉬)는 아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했고, 베로니크는 미래의 베로니카에게서 그러한다. 전자가 이미 죽음이 지나간 흔적 때문에 아파했다면, 후자는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예감 때문이다. <베로니카...>에는 막연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탱탱볼(나는 구슬이라 생각했던...)에 비친 세상은 왜곡되고, 굴곡지다. 베로니크가 꾸는 꿈도 그러하고, 멀리서 느껴지는 베로니카의 존재라는 것도 그러하며,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감 또한 그러하다.
베로니크는 인형극을 본다. 극의 주인공은 발레리나인데, 다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하게 되고 죽음을 맞는다. 마치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다 죽은 베로니카처럼. 흰 천에 덮였던 인형은 나비의 날개를 달고 환생한다. 발레리나가 보이는 그대로 나비가 됐든, 혹은 날개를 단 천사가 됐든, 그것은 베로니카를 떠오르게 한다. 아픔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엔 아픔에 대한 기억이 남는다. 베로니카를 보지 못한 베로니크가 막연하게 느낌으로만 갖는 것을 관객은 눈으로도 보았다. 베로니크의 신체를 탐하던 그 이미지는 죽은 베로니카의 시점 숏이던가.
베로니카가 심장을 부여 쥐던 이미지들 후에 맞게 된 죽음. 1인 2역을 하는 이렌느 야곱의 베로니카에게서 베로니크로, 심지어 배경인 나라가 바뀌지만 관객은, 이모는, 알렉상드르는 그리고 관객은 베로니카와 베로니카의 죽음이란 걸 계속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베로니크에게 실현되는 건 베로니카를 연상케 하는 인형의 죽음뿐이다.
죽음이란 이미지는 흔히 어두운 것일 테다. 앞서 <해리포터>를 간략하게 언급한 김에 한 번 더 하자면, 극 중 죽음을 의미하는 ‘디멘터’라는 캐릭터를 떠올려보라. 디멘터의 등장만으로 주변은 어두워지고 한기까지 맴돈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디멘터를 물리치는 마법은 강한 섬광을 내뿜는 것이었다. <베로니카...>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은 인형극 씬이었고, 베로니크가 커튼을 치고 잠든 어두운 방 안에, 어두운 색이 가득한 베로니크의 방 안에 빛이 들게 하는 건 인형극을 했던 알렉상드르였다. 베로니크는 인형극의 절정에서 인형이 아닌 그것을 공연하는 남자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다. 베로니크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과연 알렉상드르라는 남자일까, 아니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일까. 베로니크는 베로니카와 연결되는 죽음을 예감하고 울부짖다 알렉상드르와의 섹스에서 오르가즘을 느낀다. 영화에서 계속 그랬듯, 절정의 순간엔 항상 죽음이 함께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사라지고야 만다.
폴란드에 베로니카가 살고 있다. 이렌느 야곱이 분했다. 베로니카는 노래를 전공하진 않았지만 타고난 음색이 좋았다. 베로니카는 크라쿠프(17세기 바르샤바가 수도가 되기 전까지 수도이며 학문, 문화, 예술의 도시)에서의 오디션 제의를 받는다. 노래를 부르는 모습마저 예쁜 베로니카가 오디션에 합격하고 나오는 길, 시위가 한창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지나던 이와 부딪혀 악보 뭉치를 다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 시끄러운 주변의 소리. 그런 와중 베로니카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베로니크를 보게 된다.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던 베로니크, 자신처럼 빨간 옷에, 빨간 장갑을 낀 베로니크.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던 베로니크는 베로니카를 못 봤지만, 베로니카는 베로니크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홀리기라도 한 듯 시선을 떼지 못하는 와중, 주변엔 시위대와 진압대가 가득했다. 자유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던 시기였다.
베로니카의 베로니크의 이야기는 <컨택트>(2016)를 떠오르게 했다. 원작 소설은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미래에 닥칠 불행에 대해 알게 되지만,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 인생을 살아가는, 예쁜 아이도 낳고 행복을 찾는. 마치 알고 있는 미래를 잊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영화에선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이미지였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은 마치 그 삶을 관통한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된다. 베로니크는 베로니카의 죽음을 감지하고,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린다. 곁에 있던 알렉상드르는 베로니크에게 키스하고, 섹스를 하려 한다. 흐느끼던 베로니크는 오르가즘을 느낀다. 인간에겐 감정이란 영역이 존재한다. 때로 감정에 이끌려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감정이 있기에 대단한 방향을 고를 수도 있다.
다시, 그보다 앞서 베로니크가 느낀 감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베로니카는 베로니크에게 그 존재만으로 아픔을 안겼다. 다시, <베로니카...>는 <세 가지 색> 시리즈와 연결된다. <블루>, <화이트>, <레드>의 주제의식을 모두 담은 것 같은 엔딩. 릴케가 말한 “다시 한번 살아나는 것, 언젠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그것” 언젠가 나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미칠 영향,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 사람의 운명에 미칠 영향이라니. 내가 베로니크/베로니카가 된다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엔딩이지만 영화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은 엔딩.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만들어낸 허구의, 거짓의 존재 반 덴 부덴마이어의 <Concerto En Mi Minuer (SBI 15) - Version De 1798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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