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여자>

The Woman Who Ran, 2019

by 박종승

뭐라고 표현해야 적확할까. 바다가 휘몰아친다. 바람 따라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나간다. 일정한 리듬으로 들려오는 파도소리. 같은 장면이 두 번 반복되어 나오지만, 그 바다의 모습은 일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일정할 수가 없다. 그전에 부는 바람이 일정하지 않다. 사람들 간의 대화와 관계 역시 그러하다. 오늘 이 사람에게 하는 말을, 내일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반복한다고 해도 나의 감정과 생각, 상태는 다르기 마련이다. 커피를 마시며, 사과를 깎아 먹고, 같은 주제의 비슷한 대화를 나누지만 말하는 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도 모두 다르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동물이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해주는 신기한 장면도 언제 목격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우리 안의 닭들이 모이를 먹고 있다. 옆에서 텃밭을 가꾸던 영순(서영화)에게 앞집에 사는 젊은 면접녀(강이서)가 다가오더니 전 날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많이 부었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자기 오늘 면접이 잡혀있다면서. 감희(김민희)가 한 건물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가려는데, 영순이 문을 열고 나온다. 감희는 자신이 온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영순이 집에 CCTV가 있어서 감희가 온 것을 봤다고 한다. 먼저 공개된 영화의 스틸에서도 그랬지만 감희는(그리고 민희는) 길었던 머리를 잘랐다. 감희는 심지어 본인이 직접 자른 것이라 말한다.


영순: 정신 나간 고등학생 같아.

감희: 그래요?

영순: 귀여워, 어려 보여.

감희: 정신 나가 보여요?

영순: 아니야, 귀여워. 진짜 어려 보여.


감희는 영순과 함께 먹을 요량으로 고기와 막걸리를 사 왔다.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먹는 감희와 영순이 대화를 나눈다.


영순: 고기 좋아해?

감희: 좋은 고기다.

영순: 나는 사실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해.


시작부터 어딘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대화가 오간다. 영순은 이혼을 하고 지금 사는 집을 구했다. 작은 텃밭도 있고 멀리 산도 보이는 집에서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도 챙겨주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영순네 집을 찾아온 이웃집 사내(신석호)는 왜 매일 도둑고양이에게 밥을 챙겨 주냐, 아내가 예민하고 고양이를 무서워하니, 고양이보다 사람이 중요하니 멈춰줄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영순들은 사람“도” 중요하고 고양이“도” 중요하니 그럴 순 없다 정중히 사과한다. 이웃 사내는 더 대화가 되지 않으리라 판단했는지 “여기도 자치회가 있겠죠? 알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수고하세요.”라 말하며 자리를 뜬다.


수영(송선미)은 인왕산이 보이는 삼청동에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집을 구했다. 위층에 사는 건축가와 술집에서 만나 소위 ‘썸’을 타고 있는데, 같은 술집에서 만난 젊은 시인(하성국)이 수영의 집을 찾아와 만나 달라 애원한다. 수영은 시인을 향해 돌아가라고, 멀쩡한 사람이 왜 이러냐며 심지어는 욕설을 하며 돌려보낸다.


영순과 수영과의 만남을 거쳐 감희는 홀로 극장을 찾았다가 우연히 우진(김새벽)을 만난다. 우진은 과거에 감희의 연인이었던 정선생(권해효)과 결혼을 했다. 영화에서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지만, 우진은 감희에게 계속해서 사과를 한다. 감희는 이제 지난 일이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오던 감희는 정선생와 재회한다.


감희: 아, 여기 계셨구나. 안녕하세요. 저도 이제 나이가 많이 먹었는데 이렇게 뵈니까 어색하네요.

정선생: 너 왜 이런 데 오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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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로부터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감희는 남편과 결혼한 후 5년 간 단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감희의 남편은 영화에 등장하진 않지만, 감희의 입을 빌려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붙어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감희는 그것이 싫지 않고, 남편이 자신을 사랑함이 느껴지고 자신 역시 남편을 사랑하니 괜찮다고 한다. 감희는 영순, 수영, 우진을 차례로 만나며 위의 얘기를 반복해서 말한다.


50대의 서영화

40대의 송선미

30대의 김새벽


홍상수의 영화에서 김민희라는 배우, 나아가 김민희라는 화자를 빼놓고 무언갈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가 말하는 대상이 되는 이들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기를 프로처럼 구워줄 수 있고 커피도 맛있게 탈 수 있으며 손이 느리지만 깔끔하게 사과를 깎을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는, 지난 관계들을 뒤로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영순에겐 안 해도 될 말을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짓도 하게 되는 인간관계가 싫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서툰 음식 솜씨가 흠이긴 하지만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과일과 와인을 대접할 수 있는, 멋진 집을 갖고 가끔은 자유롭게 지내는 수영에겐 적당한 부러움과 격려를 전하고, 껍질이 아닌 과육을 깎아내는 우진에겐 사과를 받아주고, 오히려 괜찮노라 다독여준다.


세 명의 지인을 만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건 하나의 에피소드들 같다. 영순과의 첫 에피소드가 끝나고 수영과의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고 있을 때면 첫 에피소드와 겹쳐지는 많은 부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나아가 ‘세 번째도 이러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순의 집에선 감희가 ‘새소리’라고 언급했던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고, 수영의 집에선 까마귀 소리를 듣는다. 두 에피소드 모두 웬 남성이 집에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갔고, 감희는 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CCTV로, 인터폰으로 내부에서 목격한다. 그러나 조금씩 보이는 차이점이, 그래서 생기는 어긋남과 마찰이 눈에 띈다. 감희는 영순의 집을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갔고, 수영의 집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서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리를 차례로 옮긴다. 감희는 영순과 수영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그래서 두 번째부터는 그 차이점들에 주목하게 된다. 감희가 그 대사를 할 때의 표정이나, 상대방의 대답 같은 것들에 말이다.


<도망친 여자>에선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감희가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주고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시, 아무것도 노출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게 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같은 대화가 반복되는 동안 그것에 붙는 의미들을 적을 공간을 의도적으로 비워둔 느낌이다. 관객이 지난날 자신의 경험과 지금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문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다시, <지맞그틀>로부터 5년이 지났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나 <강변 호텔>(2019)과는 또 다른 지점이다. 당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검은 사내나, 시에 등장하는 이카라는 곳도 있었으나 그래도 하고자 하는 말에 확신이 느껴졌다면, <도망친 여자>는 그렇지 않다. 과거엔 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생각이 또 달라진 것일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라고 하는 것일까.


우진과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또 다르다. 감희가 영순과 수영에게 찾아갔다면, 이번엔 우진이 감희에게 다가온다. 과거에 감희와 정선생이 연인이었다는 것 역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지 확실하진 않다. 우진은 인기가 많아진 정선생의 상황과 달라진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감희에게 거듭해서 사과한다. 우진은 감희와의 첫 만남에서 그렇게 사과의 말을 쏟아낸 후 정선생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반복해서 언급된 것의 진심에 대해 경계한다. 다시, 그럼 우진의 반복된 사과는 진심인가? 감희는 세 명의 사람을 만나며 반복해온 말들이 있는데? 그러나 단지 의심의 영역에 머물 뿐이다. 감희가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한 말들이 진심이냐 아니냐로 판단할 수 있기엔 영화가 노출시키지 않는 것들이 많기에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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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 말하는 거 진짜 좋아해. 뭐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안 빼먹고 다 얘기해야 돼. 나 좀 지겨워.

감희: 그렇구나.

우: 너는 그때 잠깐 만나서 모를 수도 있겠다. 옛날에는 맞아, 말이 좀 적었지. 더 무거웠지. 날카로웠지 더.

감: 맞아. 근데 지금은 완전 달변가 스타일이야 그지?

우: 난 TV에 나오면 싫은 게, 같은 얘길 계속해서 하잖아. 인터뷰도 그렇고. 근데 그게 뭐니? 난 좀 이상한 거 같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남편이 사람들 앞에서 밖에서 그렇게 같은 얘길 반복해서 하고 있는 걸 듣고 있는 게 난 좀 힘들어.

감: 그지. 같은 말을 계속하는구나.

우: 그렇게 같은 얘길 계속하는데 어떻게 진심일 수가 있겠어. 같은 얘길 하는 것도 자기 기억으로 하는 거잖아. 근데 어떻게 진심을 유지할 수 있겠어. 그것도 되게 진지한 표정으로 해야 되잖아. 그게 난 좀 이상해. 그게 뭐하는 짓이야? 바보짓하는 거 같아.


감희는 정선생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던 와중 감정이 격해졌는지 자리를 떠난다. 영화의 제목은 “도망친” 여자이나, <도망친 여자> 속 여자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어떤 것인가로부터 도망친 게 아니라, 어떤 것을 향해 혹은 위해 도망친 여자다. 영화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남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뒷모습만 나온다. 이혼을 하기도 했지만, 감희들에게 남편이란 존재 역시 이 영화에선 부재하다. 심지어 닭장 안의 수탉도 자기의 힘을 과시하는, 권위적인 존재로 치부된다. 닭은 원래 교미할 때 그렇게 한다.


감희는 에무시네마의 상영관에서 일렁이는 바다의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본다. 개인적으론 에무에서 관람의 경험이 좋지 않다. 체격이 큰 내게 작고 좁은 상영관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에무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감희가 그 상영관에서 흔들리는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은 어쩐지 불쌍해 보였다. 정선생과의 만남 이후 극장을 나서서 떠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상영관으로 들어가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본다. 일렁이는 바다. 바다가 등장했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감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만히 응시할 수밖에 없는 장면. 언젠가 나도 똑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


같은 장면이 앞서 또 있었다. 개봉 전 선공개된 스틸에서도 볼 수 있었던, 영순의 집에서 새벽을 맞을 때였다.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여니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새벽의 어둠이 걷히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감희는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어떤 정보를 접한 걸까? 어떤 기사를 봤나? 어떤 연락을 받았나?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감정의 변화 없이 일상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응시할 수밖에 없는 장면. 영화는 끝이 날 것이고, 감희는 일어서 어디론가 나아갈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겨울 바다의 추위와 외로움을 딛고 일어서 나아간 영희(김민희)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감희와 영희를 가만히 바라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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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희가 에무에서 보던 장면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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