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Y CHAN-SIL, 2019
4:3 화면비를 확장하는 오프닝. 오래간 함께 작업해왔던 지 감독(서상원)의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당장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친구이자 배우인 소피(윤승아)의 가사도우미를 자처한다. 평생 영화를 만들며 살 줄로만 알았던 찬실은 갑자기 마주한 예상과는 다른 현실에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본다. 영화를 좋아했던 찬실은 수십 권의 영화 잡지 <KINO>와,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에밀 쿠스투리차의 <집시의 시간>(1989) 등의 DVD, 정성일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등을 정리하곤,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죽음과 더불어 단순한 일자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던 인생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찬실은 지난날을 뒤로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밤과 낮>(2007)부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까지 홍상수의 영화 제작을 맡았던 김초희 감독의 자전적 경험과 영화에 대한 애정이 영화 곳곳에 녹아있다. 이를테면 찬실은 <정은임의 영화음악> 녹음 테이프 중 “지난주에 소개해드린 <베를린 천사의 시>가 만일 감동이었다면, 오늘 소개해 드릴 <집시의 시간>은 눈물입니다.”라는 정성일의 말을 되뇐다.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한다던(심지어 10년 만에 안아본 남성을 상업영화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 각자 집으로 가는) 그녀의 말처럼 실내에서 촬영하는 장면들은 꽤 그의 영화들의 것들을 오마주 하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다다미방의 구조를 소피를 포함한 후배들이 찬실의 이사를 도와주고 다 함께 자장면을 먹는 장면에선 이상하게 방 안에 있는 계단으로 구조를 나눈다던가, 대문-마당-마루로 구역을 나눈다던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나리오가 소피의 말을 빌려 하품 나도록 “도저히 지루해서 못 읽”을 정도라도 말이다.
좌절하고 우울감에 빠진 찬실을 독려하는 건 그녀만이 보는 유령 장국영(김영민)이다. 의도적으로 <아비정전>(1990)을 떠올리게 하는 흰색 의상과 초록색 조명은 그야말로 노골적이다. 왕가위의 인물들은 대개 과거에서 해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동사서독>(1994)도, <중경삼림>(1994)도 <화양연화>(2000)도 그랬다. 그러나 김초희 감독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장국영은 그렇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로도 갈 수 없었던 발 없는 새, 처음부터 죽어있었던 새” 대신 어디로도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새로 그렸다. 본인의 의지로 찬실을 지켜보고, 시의적절하게 조언을 해주는 모습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에서 반야심경을 직접 손으로 새기던 청년의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감흥이 없다는 말에 찬실은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 그게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예요. ... 심심한 게 뭐 어때서요? 본래 별 게 아닌 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 그런 보석 같은 게 그분 영화에 다 나오잖아요.”라 말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제목도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엄청 두드러지진 않지만 찬실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 “연애도 못 하고, 애도 못 낳고, 땡전 한 푼 없이 이래 가”게 되더라도, 좋아하는 일이 있으니까. 영화가 있으니까. 정성일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찬실의 세상은 곧 영화가 될 것이다. 아니, 이미 됐다. 어디 찬실만 그렇겠는가?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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