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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Jan 01. 2021

캣츠비, 그리고.

강도하


<아름다운 선>이 나온지  7년이 지난 후에 읽게 되었다. <아름다운 선>은 <위대한 캣츠비>의 스핀 오프 개념으로, 캣츠비의 여자 친구였던 선의 이야기를 다루며, 그 시간은  <위대한 캣츠비> 이전, 진행 중, 이후까지를 다룬다.


 <위대한 캣츠비>가 2005년 연재였으니, 이를 읽을 때의 나는 캣츠비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청춘이었다. 이 격렬한 이야기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극도로 시야가 좁아지며 깊어지는 이 연애 이야기에.


  그런데, <아름다운 선>을 보며 그때의 격렬한 감정을 다시 느끼지는 못했다. 우아하고 격렬하고 귀여운 연출을 오가는 작법은 여전히 감탄이 나오지만, 캣츠비는 관점의 점프가 있기에 더 잘 흘러가는 이야기였다. 캣츠비의 관점만을 따라갔기에. 선은 남자들이 모두 좋아할만한 캐릭터였다. 왜 그렇게까지 할까, 싶은? 선의 관점을 통해 캐릭터의 디테일을 더하니 오히려 이 인물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름다운 선>을 7년이나 늦게 읽으며 다시 만나게 된 건 <위대한 캣츠비>를 읽던 15년 전의 나였다. 아마 강도하 작가님 역시 뒤늦게 선을 그리며 스스로의 변화를 많이 인식하지 않았을까. 캣츠비에 격렬히 반응하던 나의 미숙함이 떠올랐고, 그 시간 동안 무뎌진 지점과 벼려진 지점들이 느껴졌다.


당시에 제대로 못 봤던 <로맨스 킬러>와 <발광하는 현대사>도 이참에 보았다. 강도하 작가는 야심이 크다. 그림의 완성도, 숱한 은유들, 복잡한 플롯. 그리고 무엇보다 수컷의 자기모멸과 나르시시즘의 지점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호오가 분명히 갈릴 이야기였다.


사실 강도하 작가의 작품들은 요즘 비난받기 좋다. <위대한 캣츠비>부터가 그렇다. 지극히 남성적 시각으로 전개되기에, 아무래도 여자 캐릭터들에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생긴다. 불편하다. 이는 의도된 바이기도 한데, 플롯을 진취적으로 만들기 위해 캐릭터들이 선택하기 힘든 지점들을 선택하게끔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얻는 것도 있지만 캐릭터의 단단함은 우화적 은유의 뒤편으로 우선 순위가 밀린다. 그리고 여자 캐릭터들은 남자 캐릭터 들보다 공감을 사기 어렵게 묘사된다. 보기에 따라 폄하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 캐릭터들이 남자 캐릭터들의 욕망에 맞게 도구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은 아니다. 강도하 작가의 남캐들은 감상적일지언정, 작가는 그들에게 자기연민을 허용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잔인한 자기성찰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들이댄다. 낭패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강도하 작가가 묘사하는 남캐들의 핵심 감정이다. 오히려 남캐들의 낭패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캐들을 적극적으로 배치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도구적이다.


 강도하 작가는 여자 캐릭터들에게도 종종 낭패감을 선사하는데, 이럴 때는 남녀의 역할이 뒤집힌다. 어쩌면 남녀를 떠나 사람의 관계를 보는 작가의 관점일지도 모르겠다. 남녀를 갈라서 사고하는 일이 이야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해가 되기도 한다. 전체적인 개연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도하 작가는 남자 캐릭터의 결을 묘사하는 데에 압도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만, 도리어 그 능력이 작품의 한계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 같다. 그의 다음 작품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본다면, 이 글을 부끄러워하며 즐겁게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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