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과 흑백요리사2

난 육식을 좋아하는데...

by 행복한 이민자


흑백요리사2를 보고 있다. 처음엔 1을 본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다지 흥미롭지 않게 보았다. 그러나 매력적인 요리사들의 캐릭터와 군침도는 음식에 또 넘어가고 말았다. 현대에 남아 있는 진정한 검사들은 요리사 같다. 칼을 제 용도에 맞게 쓰는 사람들. 사람을 베는 대신 그들은 채소를 썰고 생선을 분해하고 고기를 해체한다.


흑백 요리사에는 사람과 식재료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식재료는 재료이기 이전에 생명이었다. 인간과의 유사성이 적은 해물류는 산 채로 분해하고 요리하기도 한다. 어패류는 고통을 느낄까. 느낀다면 얼마나. 어패류의 의식과 공포를 인간의 것과 비교해서 유추하는 것은 생명으로서 당연한 일일까 지나친 의인화일까. 어쨌든 어패류는 인간과의 유사성이 적은 덕에 먹을 사람의 눈 앞에서 생명을 빼앗고 조리할수록 신선하게 여겨진다. 어릴 때 나는 산낙지를 끔찍하고 무섭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 탕탕이를 보면 군침이 돈다. 산 채로 낙지를 끓이는 연포탕은 어릴 때 무서웠지만 지금은 너무 시원하고 맛있어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갓 잡은 식재료가 신선하다고 해도 우린 사람이 보는 앞에서 포유류를 잡지는 않는다. 인간과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요리사들은 고기의 뼈와 살을 분리하며 식재료를 손질한다. 과거의 사무라이가 현대에 와서 직업을 찾는다면 스포츠 선수일까 요리사일까.


난 육식을 아주 좋아한다. 육식을 즐기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이 싫다. 그래서 공장식 축산에 대한 지적이라든가, 채식주의자들의 이야기에 적당히만 곁눈질을 한다. 먹는 행복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가린다고 먹는 것들이 생명이었고, 인간이 죄책감이나 감정이입없이 편안하게 식재료를 즐기기 위해 동물들이 사육되고 죽고 손질되어 판매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과정 하나하나에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면 육식을 향한 식욕이 많이 떨어졌을까. 대부분의 현대인처럼 그 지난한 과정에서 충분히 거리를 유지하며 육식을 즐길 수 있게 된 데에 아주 약간의 불편함과 함께 감사를 느끼고 있다.


또 하나의 명분은 육아다. 아이를 키우면서 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모로서 배우게 된다. 인간은 잡식성이고 적절한 육식없이는 건강하게 몸을 성장시키기 어렵다. 사람 몸의 섭리가 그러하다니 어쩔 것인가. 그래서 난 채식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살면서 정말 채식에 대한 고민을 평생 한 번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언젠가는 사육의 시스템에 대해 내가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느껴질 날이 오지는 않을까. 현대의 수의학은 동물의 전염병이 돌 때 살처분으로 응답한다. 나는 조류나 돼지들이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살처분 당하는 과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어쩔 수 없고 이것이 더 합리적으로 많은 생명을 구하는 (재산을 구하는?) 일일지라도, 이런 ‘처리’는 인간에게 상처를 남긴다. 생명과 죽음에 대한 문제이기에. 그런데 이런 마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육식의 정당성에까지 이르게 된다. 아, 나는 고기가 정말 너무 맛있는데, 내 돈을 내고 사먹는 고기에 대해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가지면 뭐가 좋은가. 내가 느껴야 할 것은 오히려 감사가 아닌가.


그런데 육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스템과 분업에 대한 감사와 육식 자체에 대한 고민과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가 꼭 다른 길을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국 둘 다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살면서 정말 그 고민에 정면 대결할 용기와 필요를 스스로 불러들여 느낄 날이 있겠는가이다. 인생에서 한 번은 마주쳐야할 숙제같은 기분이 든달까.


하지만 이런 의무적 고민보다 나를 지금 사로잡고 있는 건 요리하는 모습이다. 요리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수행의 숙련됨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 숙련은 수많은 식재료와 인간이 같이 보낸 시간에 비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식재료는 대체로 생명에서 온 것이고… 무한반복. 요리사여. 인간을 위해 거둬들인 생명을 그대는 어떻게 처리해서 어떤 의미를 두어 어떤 기쁨과 만족으로 만들 것인가.


어울리지 않는 질문들이다. 요리의 세계와 채식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 그런데 그 질문은 결국 또 어우러진다. 채식도 조리법의 문제로 돌아오고, 요리는 식재료의 출처와 관리, 시스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으니. 별로 어울려보이지 않는 것끼리의 끈끈한 관계를 들여다본 기분이다. 하긴 이번 편에는 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스님도 계시니 더욱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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