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규어로스 내한 공연(16년 11월 12일)
좋은 걸 보거나 들으면 왜 좋았는지를 생각해본다. 그런데 왜 좋았는지 표현이 잘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억지로 표현해보면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시규어로스의 음악이 그렇다.
다시 말하면 시규어로스의 음악은 환원되거나 분석하기 어렵다. 가사와 멜로디, 음표와 악기 편성, 1절과 2절, 전주와 브릿지, 후렴구 등 일반적으로 팝을 들을 때 익숙한 잣대가 시규어로스의 음악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장르라는 잣대를 대보려 해도 과문한 탓에, 시규어로스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느껴진다. 사실 시규어로스가 ‘밴드’라는 이미지 자체도 낯설었다. 3인조가 각자의 악기를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공연은 시작부터 터널 속으로 진입하는 느낌이었다. 공연장 전체가 깊은 몰입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종교적 공간. 성가를 들으며 깊숙이 위안 받는 사람들. 스타에 대한 열광과는 다른 종류의 소통이었다. 시규어로스는 정말 말 한 마디 없이,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전에 자국어로 ‘마지막 곡’이라고 딱 한 마디를 한 듯 하다.) 연주에만 열중했다. 이 공연에서 비디오 아트는 아주 중요했다. 연주자 뒷 면과 양 옆의 스크린에서는 다른 영상이 플레이 됐는데, 보통 많이들 쓰는, 멀리 있는 관객을 배려한 스타의 클로즈업 영상이 아니었다. 명상을 유도하기 위한 PC의 스크린 보호기 같은 종류의 영상이었는데, 깊은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차가운 사막에서 온도가 바뀌는 바람을 맞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공간에 그림을 걸어놓을 때, 구상화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쉽고 분명하게 파악되고,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혹은 취향에 맞는지 아닌지가 쉽게 파악되는 것은 좋다. 그런데 자기 공간에 걸어놓는 그림이라면 한 두번 보고 말 것이 아닌, 계속 보게 되는 그림이다. 구상화는 어느 공간에 걸려있든 자기 자신을 주장한다. 명확한 대상을 특유의 방식으로 표현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감상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닌 상시로 걸어놓는 그림이라면, 그림의 주장에 대해 늘 신경을 쓰게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림이 공간의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은 공격적이거나, 상관이 없어진다. 주장을 듣거나 말거나.
대신 추상화는 사적 공간에서 자신을 선명하게 주장하지 않는 그림이다. 애써 해석을 하려 해볼 수도 있지만, 그대로 두고 느낄 수도 있다. 추상화는 어떤 방식의 창작 계획과 창작 과정을 거쳤는지 쉽게 환원되고 분석되지 않는다. 그 ‘모르겠음’은 오히려 그림의 존재 자체를 공간의 분위기로 받아들이게 한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합의된 감상의 틀을 공유하지 않은, 실용성과 무관한 어떤 존재가 환기하는 정서.
공연장의 음악과 영상에서 느낀 바는 공간에 걸어둘 그림을 고민할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분절지점이 느껴지지 않는 음악과 영상의 흐름, 그리고 연주에 몰입하되 스타의 인격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빽빽이 들어선 스탠딩 석의 관객들이 환호와 열광 대신 고요한 몰입으로 반응하는, 처음 보는 공연, 처음 겪는 경험.
모든 영상이 추상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3인을 비추는 이동식 카메라는 계속 작동 중이었고 영상은 콘서트 장면에 흔히 쓰이는 타격되는 드럼, 기타 줄을 내리치는 손, (욘시의 경우에는 활(!)), 건반 위의 손, 가창자의 클로즈업을 전시하기도 했으나, 여러 필터가 입혀지거나 색과 프레임이 많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구체적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면서도, 관객과의 소통의, 혹은 인지의 가능성은 남겨놓은 형태랄까. 조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타를 비추되 스타를 내세우기 위한 조명이라기 보다는, 그저 감상의 구심점을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 적절히 연주자를 밝혀주는 의도로 읽혔다.
그런 점에서 새롭고 고마웠다. 아이슬란드 모국어로 불러도 어차피 못알아 들었겠지만, 그 누구도 알아 들을 수 없는 ‘희망어’(!)로 부른다는 그들의 노래와 긴 러닝타임, 장르로 구획이 되지 않는 그 독자적 존재감을 만들어낸 이들이라면, 사실 관객과의 소통의 형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했을 법 하다. 그런데 이들이 택한 방법은 겸손하게도 일반 콘서트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주는 것이었다. 익숙한 트러스트와 프로시니엄 무대. 그 흔한 돌출형 스테이지도 활용하지 않고 소리의 생산에 집중하는 밴드. 그들이 가진 독창성이 오히려 콘서트 형식에 있어서의 담백함을 수용하게 한 걸까. 영상과 음악의 전위적 속성 때문에 지나친 무대 장치가 몰입을 깰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1회성 해외투어의 한계였던 걸까. 어느 쪽이든, 그 자체도 독창성과 겸손함으로 다가왔다.
콘서트는 우상화된 스타와 그에 열광하는 관객의 에너지가 오고 가는, 솔직히 좀 피곤한, 그래서 더 좋을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문화 체험이다. 그런데 시규어 로스의 공연은 에너지 덩어리가 곱고 단단하게 조금씩 조금씩 팽창하여 실내체육관을 천천히 높은 밀도로 채운 다음에, 관객 하나 하나에게 그 분위기와 에너지를 스며들게 하며 끝났다는 느낌이었다. 여느 콘서트와도, 혹은 클래식 연주회와도 다른 경험.
좋고 새롭고 깊은 것을 만나고 왔다. 그런 것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그들이 창조한 에너지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