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가 된 소녀
3. 환상, 불행의 단독성
당시 난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읽고 있었다. 이 소설은 어떤 순간에, 자신의 그림자가 일어난다는 환상을 극의 주요 환상적 은유로 쓰고 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이 소설에 대해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닥치는 불행을 환상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그 불행의 단독성을 오롯이 살려낸다.’고 평했다. 그래, 이것이 하고 싶은 일이었다. 불행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일. 300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이 죽은 사건 300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끔. 영문도 모른 채 어느 순간 액자로 변해버린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이 엄청난 불행의 단독성을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시점에 유족 분들과 이 나라 공동체에 봄직한 이야기가 아닐까.
당시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찾아보았다.
"<드라마 스페셜 - 액자가 된 소녀>의 유종선 감독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벼락같은 사건을 당했을 때 자신을 탓하게 된다.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서 이 작품이 출발했다고 말했다. 갑작스런 이별들이 벼락처럼 닥쳤던 올해의 질문"
-기자간담회 후, 웹진 <아이즈> 최지은 기자 트윗
"(슬픈 일을) 모두가 함께 공감해주면 좋을텐데 우리는 '마주 하고 끝'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다같이 이런 경험을 겪고 있는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고, 지금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변신의 판타지를 이용해 풀어봤다"
- <스포츠투데이> 문선호 기자의 기사 중 발췌
두 기자 분이 기자 간담회에서 두서없이 풀었던 말들을 잘 담아 주셨다. 그렇게 <액자가 된 소녀>는 출발했다.
4. 작가 이강
머릿 속에 소재와 인물, 주제, 그리고 대략의 얼개가 떠오르자 나는 이 작업을 함께 해나갈 파트너를 구하고 싶었다. 인턴작가 중 이강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쓴 대본이 좋았다. 관점과 톤이 나와 잘 맞을 것 같았고, 섬세한 필력과 극을 구성하는 뚝심이 마음에 들었다. 읽다가 울어버린 작품도 있었다.
"한 소녀가 하루 아침에 액자로 변해버린 거에요, 그 소녀를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거에요..." 나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강 작가와 처음 따로 만나 작품의 모티브를 이야기하며 나는 주책맞게 자주 코 끝이 시큰해졌고, 이강 작가의 눈도 종종 빨개졌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이었고, 이강은 재능 있는 작가였다. 이미 2013년 KBS극본 공모에 <다르게 운다>로 최우수작에 당선되어 인턴작가를 시작한 터였다. 우리는 더듬더듬 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2014년 6월 경이었다. 세영의 이름은 안산 분향소에서 마음에 남은 영정 사진 속 소녀의 이름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소녀의 할아버지와 친구 한 명. 이렇게 이야기를 구성해보기로 했다.
최초의 의기투합이 아무리 좋았던들 어찌 부침이 없을까. 작업 과정은 아주 당연하게도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비슷해도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 방송은 10월 말로 내정되어 있다가 2주가 밀려 11월 9일이 되었다. 우리는 쓰고 엎고 쓰고 엎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기를 반복하며 극의 살을 붙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