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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막극 제작기 4 - 캐스팅

액자가 된 소녀

by 행복한 이민자



- 캐스팅

1. 선생님, 선생님, 나의 선생님.

드라마에서 손녀를 되찾으려 노력하는 할아버지 성택 역은 최종원 선생님이 맡아서 작품을 빛내주셨다. 촬영 삼일 전 연락을 드려 캐스팅을 여쭈고, 이틀 전 밤에 만나 대화와 리딩, 의상을 맞추고 바로 촬영을 한 가혹한 스케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성택 역을 구축하셨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드라마가 제대로 방송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만큼 깊이 감사하고 있다.

제작기가 늦어진 것은 사실 최종원 선생님께 누가 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나의 깊은 감사에도 불구하고, 최종원 선생님이 급하게 캐스팅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캐스팅이 엎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어폐가 있다. 연출이 캐스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성택 역에 원래 오셨던 분은 나의 선생님, 오순택 선생님이셨다. 오순택 선생님이 누구인가. 33년생. 헐리우드 1세대 한인배우. 20대에 도미하여 배우 생활 50여년. 영화 120여편, TV시리즈와 연극 뮤지컬까지 합치면 3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배우.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뮬란 아버지 목소리 배역, <007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007의 조력자 힙 중위, ABC 미니시리즈 <에덴의 동쪽>의 집사...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를 오가며 자신의 영역을 획득한 배우. 그리고 나의 선생님.



내가 그 분을 처음 만난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강의실에서였다. 당시 74살이셨던 선생님은 눈으로 보기엔 환갑을 갓 넘겨보일 정도로 젊었다. 한 학기는 연기 이론을, 한 학기는 연기 실습을 수강했다. 전문사 과정(실기 석사, MFA)이었기에 수강생이 그리 많진 않아서 선생님의 수업을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풍부한 경험과 지적 능력만으로도 압도당할만한 일이었지만 가장 내게 감명 깊었던 것은 선생님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학생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그 순간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온화하게 집중하시는 그 모습에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선생님의 지적이나 가르침은 늘 적확하게 마음을 울리며 고민 거리를 던져주었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연기과의 많은 학생들이 나와 같았다. 혹자는 '아이돌'이라고 표현했다. 맞다. 우상이었다. 그렇게 평생의 커리어를 일구고 진심으로 제자를 거두기 위해 집중하시는 그 모습은.




KBS 합격 소식을 들은 것도 선생님의 수업 중이었다. 학기 마지막 강의 시간, 연기 실습 발표 중이었다. 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였는데, 코미디였기 때문에 성역할을 바꾸는 바람에 나는 여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연기과가 아닌 연출과였기 때문에 정말 어렵고 창피해서 죽을 맛이었다. 그 때 무대 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놓아둔 내 폴더폰 화면에 문자 수신의 빛이 반짝였다. 열었더니 '축하'라는 글자가 언뜻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 나가서 무슨 정신인지 모르게 맡은 배역을 끝냈다. 여느 때처럼 온 정신을 집중해서 보고 계시는 선생님 앞에서.

모든 발표가 끝나고 학기 마무리로 호프집으로 이동하며 나는 선생님께 합격 소식을 알려드렸다. 연극 연출 대신 드라마 연출을 하게 될 것 같다고. 선생님은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주셨다. 그리고 언젠가 작품을 같이 하자고 인사를 건내셨다. 한 4, 5년 조연출 열심히 하면 연출하지 않겠냐며. 나는 황송했다. 선생님을 나의 배우로 모실 수 있다면,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