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arrival),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삶을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삶과 세상을 인지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내 기억에서 지워진 인지의 시작을 아이를 통해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상은 실험실이 아니어서, 관찰보다는 아기가 먹고 자고 배변하는 일을 해내고 유도하고 인내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이를 보호하며 부모의 인지체계로 조금씩 이끄는 것이 양육이었다. 양육을 하며 시간을 인지하는 새로운 단위가 마음 속에 생겼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내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그 전까지 난 시간을 그렇게 묶어 가늠해본 적이 없었다. 과거 시간을 그렇게 묶자,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내 인생의 작은 사건들이 또 다시 새로운 의미가 되어 떠올랐다. 먼 유년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경이와 신비, 그리고 분노와 배신의 사건들이. 새 생명의 탄생이란 부모에게 삶의 시간 인식 단위를 새로 선사하는 일이었다.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와 영화 ‘컨텍트’(원제 Arrival)는 인간의 인지 체계에 대해서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을 닮았기에 인과율에 따라 논리적이고 순차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하지만 외계인은 같은 물리적 세상에 대하여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가진다. 시작과 끝을 한 묶음으로 인지하고 언어화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페르마의 정리’를 가져온다. 이것은 빛이 수면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원리에 대한 이론이다.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외계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소설 발췌) 두 번째 설명이 가능하려면 빛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같은 물리적 현상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의 인지체계와 반대방향에서 세상과 삶을 인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자인 주인공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혀가면서 그들의 사고방식 대로 삶을 조금씩 ‘동시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 작품은 많고 많은 시간 여행 이야기에 대한 언어학적 물리학적 접근이다. 그런데 루이스가 동시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삶은 비극적 결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 비극적 결말을 피하기 위해 현실의 선택을 바꾸는 방식의 이야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에게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일이 남아있다. 인과율에 따라 성공적 결말을 내는 게 아니라면, 그녀가 동시적으로 경험한 미래의 눈부신 순간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끝이 나쁘면 삶의 책을 덮고 다시 써야만 삶의 의미가 있나. 끝이 좋다면 그 가운데의 산발적 고통은 알고도 겪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인간이 삶과 시간, 세상을 인지하는 체계에는 빈틈이 있다. 그 빈틈을 빈틈으로 두고 가끔 아주 조금씩 채워가며 살아간다. 심지어 그런 삶을 아이가 닮아간다. 아이를 보며 어느 순간, 나는 동시적 삶을 경험한다. 유년의 나와, 현재의 유년인 아이. 우리는 순차적으로 삶을 살면서 끊임 없이 합목적적으로 삶을 구획짓고 의미를 도출한다. 픽션이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는 외계인의 언어를 해석하며 그 시야를 넓힌다. 그리고 그 시야 안에서 삶을 인지하게 될 때 가져야 할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늘 새롭게 인지하기를, 늘 강건하기를. 동시적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가족이라는 존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