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 운명
로건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성공이라 부를만한 어떤 꿈이 없었다. 그의 능력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번 분노하며 아프게 피로하게 싸워왔을 뿐이다. 그랬던 그가 그나마 마음으로 존중하고 따랐던 것은 찰스 자비에 교수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뮤턴트가 차별받지 않고 능력을 공익에 쓰며 조화롭게 사는 세상. 다름이 혐오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 로건의 냉소는 그런 세상이 와도 자신은 여전히 혐오의 대상이리라는 예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는 불멸이고, 재능은 다른 뮤턴트들과는 달리, 인위적 실험으로부터 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에 교수는 그가 존중할 수 있는 신념과 책임있는 행동을 보여준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이미 모두가 죽은 후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놀랍게도 로건은 노쇠해지고 있다. 그리고 치매가 온 찰스 교수를 돌보며 콜 리무진 기사로 살아간다.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 그들은 구시대의 유물답게,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길 바란다. 혐오가 이겼고, 꿈은 사라졌다. 늙고 쇠약한 찰스를 돌보는 일은 지난 존경에 대해서, 그리고 여전히 닥쳐올 무의미한 시간에 대해서 로건이 선택한 삶의 이유다. 콜 리무진의 기사로서, 그는 주로 술에 취해 환희에 들뜬 사람들을 운전한다. 그들의 기쁨은 로건과 무관하다. 그는 관계의 대상이 아니다. 젊은 여성들은 가슴을 드러내며 그를 희롱한다. 그 정도로 로건은 퇴물이다. 무장강도가 공격해도 손톱이 제대로 솟지 않는다. 이제 그가 분노하는 것은 밥벌이에 대한 위협 뿐이다. 리무진에 상처내지 마 이 자식들아. 돈 벌어야 해. 그래서, 배 하나 사서 찰스 교수랑 떠나버릴 거야.
쇠락하고 고단한 히어로가 여자 아이를 구해내며 구원받는 이야기. 포스터로 느껴지는 영화 <로건>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건 <레옹>이나 <아저씨>와는 다르다. 그가 구해야할 대상 역시 새롭게 탄생한 뮤턴트이기에, 성인의 일방적 책임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는 뮤턴트 답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피를 묻힌다. 이 영화는 너무나 에고가 강한 삼대가 뭉친 대안 가족의 로드무비 같다. 그 길이 방어를 명목으로 한 고어적 살육으로 점철되어 있긴 하지만. 어쩌다 가장 역할을 맡게된 로건은 고단함과 짜증으로 투덜대지만 보호자 역할을 은근히 즐긴다. 목표 없던 삶에 역할을 주기 때문이리라.
허나 그의 결정적 문제는 그가 다음 세대에 전수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꿈을 믿지 않는 인물이, 이미 실패한 꿈을 아이에게 이식해줄 수 없다. 아이는 미래를 꿈꾸지만, 로건에겐 현재를 무의미하게 버티는 습관만 남았을 뿐이다. 그가 맺는 모든 관계는 그의 능력에 대한 적의 추적 때문에 살육과 파괴로 끝난다. 끝없이 도망치는 삶. 그 삶을 그대로 물려받을 것 같은 아이. 같이 있자니 아빠 노릇을 못하겠고, 떨어지자니 애가 위험하다. 그런데 같이 있는 게 더 큰 위험을 불러들일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젠장.
울버린 마지막 이야기는 결국 실패한 아빠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다. 성실하게 임하지 못했던 꿈은 실패했고, 동료들은 모두 사라졌다. 삶이 실패했는데 무엇을 물려줄까. 그런데 의외로 더 큰 추락을 겪은 자비에 교수는 고통 속에서도 위엄이 남아 있다. 그가 꾼 꿈이 실패했다고 해서 새로운 세대가 그 꿈을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꿈을 꾸고 실패하며 살아갈 것은 그들의 권리다. 보호자는 그들이 그 와중에 작은 꽃이라도 피워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하고 지켜볼 뿐이다. 어차피 누구나 실패할 운명이다. 쇠락과 죽음이 우리 여정의 끝에 있지 않는가. 생명의 목표가 생명의 유지라면 어차피 모든 삶은 실패한다. 우리에게 남은 건 그 실패로 향하는 길을 어떻게 걷는가이다.
감독은 자신의 영혼을 흔들었을 서부극을 영화 속에 삽입하여 존경심과 테마의 공유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 스며드는 인상은 서부극 보다는 스웨덴 영화 <렛미인>으로부터 온다. 고독이 예정된 특별한 아이. 길들지 않은 맹수의 새끼같은. 이유야 어쨌든 이 아이는 영화 초반부터 자신을 공격하는 적에 대하여 살육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차피 이야기도 등장인물들도 아이를 순수 속에 보호해야할 의무가 없다. 아이가 등장함에도 관계와 삶에 대해서 직접 질문하는 영화의 톤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몇 가지 장면들에서 머뭇거려졌다.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저 아역은 이 영화를 보면 안 될 것이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관람 불가 장면’에 이 아역은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어떻게 실제 촬영을 진행했는지 궁금해진다. 씬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하면 안 됐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 장면을 어떤 태도로 관람해야 하는지도 조금 조심스러웠다.
영화는 길지만 재미있는데, 영화의 모든 요소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딱딱 맞아들어가 거둬들여지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다만 휴잭맨의 얼굴에 새겨진 고통과 늙음이 관객을 휘어잡는다. 2000년에 우린 <엑스맨>에서 로그와 트럭을 타고 했던 대사를 기억한다. ‘그 손톱... 아파?’ ‘나올 때마다.’ 우리는 17년동안 휴잭맨과 함께 이 캐릭터를 보며 성장하거나, 같이 늙어온 것이다. 그의 고단함과 회의를 그저 가볍게 관람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Ps.
로건을 보며 마블 코믹스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떠올랐다. 30년 전이다. 영화에 나오는 코믹북과 흡사한 만화잡지로 처음 엑스맨을 접했다. 장난감으로 먼저 본지라 연재 만화의 내용이 궁금했던 터였다. 어떤 코스튬의 슈퍼 히어로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전투에 임할까. 그런데 내가 본 첫 에피소드에는 어떤 슈퍼히어로가 고독하게 부랑자처럼 입고 그 어떤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심지어 싸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쇠락하여 눈을 맞으며 죽어가는 이야기였다. 나중에야 그 캐릭터가 데어데블임을 알았다. 슈퍼 히어로의 ‘실패할 운명’에 대한 관심은 그 때부터 생겼던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로건>은 내게 가장 엑스맨 다운 영화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