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셔 전시회 (세종문화회관, 7/17-10/15)
에셔 전시회 (세종문화회관, 7/17-10/15)
우리는 혼돈에 열광한다.
질서를 만드는 걸 사랑하기 때문에.
We adore chaos,
because we love produce order.
이번 전시에서 알게 된건 에셔는 판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점이다. 에셔가 즐겨 그리는 복잡하고 모순된 공간을 판화로 표현하려면 전체와 세부에 대한 각각의 완성된 설계가 있어야 한다. 흡사 건축가의 일과 같다. 에셔는 실제로 그림을 좋아하는 학생으로 건축을 공부하다가 그래픽 디자인으로 넘어갔다. 패턴에 대한 그의 집착에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패턴을 반복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시키고 개념을 바꾼다. 세부사항을 지배하는 엄격한 법칙이 전체로 펼쳐지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환상적인 그림으로 나타난다. 에셔는 작품마다 그 작품을 구성하는 질서를 만든다. 그리고 감상자에겐 그 질서를 해독하는 것이 감상 포인트가 된다. ‘신기하다’는 최초의 감상이 인수분해 되듯 그 기원으로 내려가는 걸 확인하는 재미가 있던 전시였다. 그리고 에셔의 고민이 시나리오 작가의 고민과 흡사하다는 걸 느낀다.
1. 테셀레이션
도형으로 평면이나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는 걸 말한다. 혼돈으로부터 일정한 법칙을 끌어내 패턴화 하여 공간을 채워가지만, 그 패턴화의 법칙은 계속되어 기존의 패턴을 다시 변화시키고 빈 공간으로 부터 새로운 패턴이 탄생한다. 에셔가 테셀레이션을 작품에 구현하는 방식은 이야기를 포착하는 방식과 흡사하다. 혼돈스러운 현실에서 초점을 맞출 인물, 혹은 사건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되는 인과적인 사건 전개를 따라간다. 그러나 그 전개의 빈 틈으로부터 이야기의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며 전환점을 맞는다. 혼란을 정돈하는 관점, 관점의 발전이 가져오는 행동의 논리, 그 논리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당혹…… 테셀레이션으로부터 만들어진 에셔의 작품 <메타모포즈>를 보고 있으면 끊임 없는 패턴의 변화와 흐름이 마치 이야기의 흐름을 보는 듯 하다.
2. 펜로즈 삼각형
불가능한 입체 삼각형이다. 에셔가 만드는 모순된 공간의 논리를 단순화하면 이 삼각형이 나온다. 입체로 보이지만 평면에서만 가능한 도형이다. 각 꼭지점, 세부사항의 논리는 맞는데 연결하여 전체를 보면 불가능한 모양이 된다. ‘영원히 계속되는 사각형 계단’ 같은 이미지인데, 그 위에 그려져 있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이야기로 치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원칙을 삶의 돌파구마다 관철해 살아왔는데, 크게 왜곡된 인생에 다다른 인간을 다룬 비극 같달까. 혹은 정반대로 얘기할 수도 있겠다. 매 순간 아무 것도 원하는대로 되지 않아 설상가상으로 쫓겨가는 인생이었는데, 한 바퀴를 돌고나니 제법 그럴듯한 그림으로 완성되어 있는 코미디.
3. 메타모포즈
테슬레이션과 펜로즈 삼각형은 하나의 완결된 개념의 표현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에셔가 이를 바탕으로 포착하는 것은 미묘한 변화가 양질 전환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그려놓은 대상이 아닌 빈 공간이 어느 틈에 새로운 그림이 되고, 세부의 디테일에 설득되어 따라가다가 모순된 공간이 왜 생겼는지를 따져 묻게 된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포착하고, 그 질서가 새로운 혼돈을 낳는다. 반복 속에 새겨진 섬세한 변화들.
4. 시간 예술
그 변화의 과정을 따라가야 그림의 온전한 감상이 가능하기에 에셔의 작품은 회화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예술적인 특징을 띈다. 그 과정은 틀을 깨는 해체적 현대 소설의 입장과도 비슷해 보인다.
고전주의 미술 중에도 현대로 치면 블록버스터 영화에 해당하는 야심을 담은 회화가 많다. 거대한 캔버스에 많은 등장인물로 부분 부분의 서브 플롯을 담고, 영웅적 주인공이 겪고 있는 절정의 순간을 그려내 그 전후를 상상하게 한다. 회화지만 하나의 이야기(주로 신화적 이야기)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그림이며, 그럼으로써 시간 예술로서의 속성이 생겨난다.
5. 당혹
에셔의 그림이 서사의 관점에서 읽히는 것은 현대 서사의 매력은 그 ‘당혹감’에 있지 않을까 해서다. 세부의 논리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때의 당혹감. 그러나 그 모순도 일정한 규칙을 가진 변화 과정 속에 수용되는 모습. 그 규칙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작가. 당혹 속에 몰입되는 관객들. 빈틈 없이 구성되는 고전주의 회화가 아니라 빈틈이 발견된다는 것을 ‘빈틈없이 증명’하는 에셔의 판화. 이런 것이 현재 서사를 대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이라는 혼돈 속에 규칙을 발견해 조직하고,
그 규칙이 또 다른 혼돈을 그려내는 치밀함.
전시회에 걸려 있던 에셔의 말은 그래서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