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경
<낫플레이드> 배우를 소개합니다. #3
원미경
1984년부터 85년까지 방송된 MBC주말극 <사랑과 진실>은 김수현 작가님이 집필한 공전의 히트작이다. 당시 토요일까지 직장에서 시달리며 육아와 가사를 병행해야 했던 한 30대 중반의 여성에게 그 드라마 시청은 양보할 수 없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나 어느 주말 그녀를 막아세운 장애물이 있었으니 그건 그녀의 미취학 아들이었다. 그 미취학 아동은 동시간대 방송하는 KBS의 <유머1번지>를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은 서로 사생결단 채널권을 두고 부딪쳤다. ‘이 정도 낙 마저 빼앗길 순 없다’는 젊은 엄마의 의지는 확고했고, 곧 그 미취학 아동은 징징 울며 주공아파트 옆동에 살고 있던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외갓집엔 역시 <사랑과 진실>의 오프닝에 막 몰입하려는 외할머니가 계셨다. 미취학 아동은 로터리방식 텔레비전으로 달려들어 ‘드르륵’소리와 함께 채널을 돌려버렸고 외할아버지와 함께 <유머1번지>를 보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속절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손주네 집으로 향했다. 딸과 함께 드라마를 보기 위해.
그 미취학 아동이 매주 고집을 부렸던 것 같지는 않다. <사랑과 진실>의 화면이 아직 흐릿하게 기억나고 뭔가 같이 재밌게 봤던 것도 같다. 운명이 엇갈린 두 자매 이야기였던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애리, 그리고 원미경이었다.
이 단막은 원미경 선생님을 찍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으로부터 비롯됐다. 종이 위의 글이었던 공모당선작은 그 욕망의 뼈대 하나로부터 다른 모든 장기와 살점을 입어갔다. <사랑과 진실>은 먼 기억이지만 2000년의 <아줌마>, 2002년의 <고백>등은 아직도 생생한 작품들이었다. 그 시간을 지나와 이제는 손주를 보게된 어떤 여성의 얼굴로 원미경 선생님의 얼굴이 오롯이 떠올랐다.
실제로 80년대의 슈퍼스타 원미경 선생님은 이른 결혼을 하고, 자녀를 셋을 낳아 기르며 14년 여의 공백기를 갖게 된다. 그리고 다시 배우로서의 기지개를 새롭게 펴는 모습을 이 단막에 담고 싶었다. 주인공과 사뭇 비슷한 삶과 정서의 결이 있었다.
원미경 선생님의 사부님은 96년 <애인> (황신혜 유동근 주연), 97년 <신데렐라>(황신혜 이승연 주연)등을 연출하신 이창순PD(현재는 목사님)다. 난 개인적으로 03년작 <눈사람>(공효진, 조재현 주연)의 팬이었다.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촬영과 콘티였고,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였다.
촬영을 다니는데 20,30대는 원미경 선생님을 잘 몰라보는 경우가 많았고, 50대 이상은 너무 반가워하고 흥분하고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세대의 파도와 같은 사랑을 감당해야 하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정작 그 엄청난 사랑을 받던 당시는 힘드셨다고 했다. 스튜디오 조명 아래서만 20대 전부를 보내다시피 했다고. 어쩌다 대학교로 야외촬영을 나가면 밖을 걸어가는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그리고 대중의 사랑에 보답하는 일은 그냥 실망할 일 없게 잘 사는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각각의 시대를 풍미한 배우와 연출은 삶과 일의 좋은 파트너였으리라. 연출 속을 제일 잘 알만한 분을 카메라 앞에 세웠으니 나도 별 수 있나, 그냥 투명 망토 입은 느낌으로 열심히 할밖에.
아드님이 고등학교 때까지 (미국에서) 공부와 농구 선수를 병행했다고 한다. 운동능력에 대한 인종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시간을 같이 했었다는 말씀에 저도 농구팬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왜 그 NCAA를 우승시킨 카멜로 앤써니 선수가…지금 뉴욕에 있다든가?…’ ‘아, 지난 시즌에 오클라호마로 이적했죠! 저 집에 뉴욕 시절 저지가 있는데!’ 라는 뜻밖의 대화를 나눴다. 카멜로 앤써니를 아는 배우, 원미경이다.
아무래도 아드님의 운동신경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원미경 선생님의 증언에 의하면 사부님은 공과 친한 스타일은 아니라고. 당구에 금세 익숙해지시고 자세가 나왔다. 사실 캐스팅 전에 배우의 운동신경까지 알 수는 없기에 걱정한 면이 있었는데, 너무나 다행이었다.
84년의 <사랑과 진실>이 33년을 지나 2017년의 단막극과 만났다. 그 시간이 배우의 삶과 얼굴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걸 내가, 대중이 기억한다. 드라마 일을 하기에 가끔씩 만나게 되는 귀한 시간이다.
ps1. 원미경 선생님은 이 단막을 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빼서 생활터전인 미국에서 귀국해주셨다. <낫 플레이드>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 캐스팅 되셨고 그 방송이 먼저 나갔다. 직업인으로서는 단막극 하나로 귀국을 하기에 채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귀국 결정에 감사드리고, 좋은 작품을 하나 더 하시게 되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ps2. 처음에 언급한 그 미취학 아동의 엄마는 그 후 아들에게 ‘니 진짜 엄마 찾아가’라는 드립을 가끔 정색하고 하면서 미취학 아동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이제보니, 그게 <사랑과 진실>의 명장면 중의 하나였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원미경을 정애리로 착각하고 ‘니 진짜 엄마 찾아가라’라고 말하는 데서 아! 운명이 뒤바뀐 두 자매의 인생역정이 펼쳐지는데… 아…난 드라마 대사에 당한 거였구나…
ps3. 정애리 선생님은 2008년 일일극 <너는 내 운명>에서 조연출로 만나뵈었다. 그 또한 10년 전이 되었다. TV를 통해 쌓이고 흩어지는 대중의 기억이 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