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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Jan 23. 2018

2018년 1월 KBS새노조 파업 승리.

감사합니다.

 이토록 다른 우리가 이처럼 하나 될 수 있다니. KBS새노조의 파업의 시작에는 늘 이같은 감동이 있었다. 직종 간 갈등, 직종 내 갈등, 정치적 의견 차이, 신구의 차이, 혹은 직업적 소명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공영 방송 직원이 하나되지 못할 이유는 너무나 많았기에. 그같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건 넘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온 선을 넘는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일터를 폭력적으로 침탈하고 묻지마 기소를 통해 정당한 지위를 박탈하고 권력이 방송을 사적으로 유용하고…적지 않은 수가 거기에 부역하고… 너무나 저열해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그걸 온 세상이 알고… 그럼에도 수신료를 취하고 그리고 월급을 받고…


 그러나 파업의 끝에는 늘 선명한 자각도 같이 했다. 이처럼 하나 됐던 우리지만 여전히 너무나 다르다는 것. 아마도 방송을 멈추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드라마 조합원이어서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존재감을 시위하는 것이 파업일진대, 존재감을 오히려 약화시키며 파업 대오에 실질적인 힘도 실어줄 수 없을 때, 도대체 조합원으로서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같이 하는 스태프들의 노동량이 급증하고 보수 지급이 늦어진다. 일을 잃게 되는 사람도 있다. 업무에 그대로 임하는 사람들에게도 심신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감정의 골이 패인다. 조합원으로서도 직업인으로서도 나약해지고 희미해지는 자존감을 버텨내는 일이 파업에 임하는 변방의 조합원으로서의 큰 숙제였다. 수신료를 취하는 공영방송의 직원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데에도, 드라마 연출/프로듀서라는 직업에 헌신하기에도 무능한 나를 자꾸 마주보게 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런 느낌은 비단 드라마국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적 소명을 그 어떤 차원으로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사는 느낌.


 소명의식. 그리고 보니 지난 적폐 정권의 시간 동안 제일 치명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가진 마음 속 소명의식을 짓밟은 데에 있었던 것 같다. 방송쟁이 초년에 가진 최고의 설렘은 지금 내가 만든 방송을 동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사실이었다. 방송은 시청자와의 약속이야!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는 데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시청자와의 공익적 약속이라니. 방송을 허투루 대하면 안 된다는 소명감. 단지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무언가를 약속에 맞추어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를 자발적 격무에 몰아 넣을 수 있었던 최고의 동기 부여였다.


 그런 소명 의식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일수록 일에서 밀려나고 고통을 받았던 것이 지난 10년의 방송국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일반화일까. 그냥 아무렇게나 권력의 입맛대로 맞추라는 것. 위에 맞추는 사람은 아래도 맞추기를 기대한다.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권력 구조는 그렇게 켜켜이, 사적 이익에 맞춰 아무렇게나 만들기를 강요한다. 방송은 권력 확인의 도구이자 권력 자랑의 무대가 되었다. 아니, 시청자와의 신성한 약속이라면서? 공공재라면서? 이 혼란과 패배감을 극복하고 싶다는 열망이 결국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같은 대오를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대오를 이룬다고 해서 혼란과 패배감이 자동적으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노조의 존재 자체를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파업이 그렇게 쉬웠을리가. 남는 건 너의 상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속삭임은 그 어떤 거대한 감동의 한 켠에도 끊임 없이 박혀 있던 가시 같은 자각이었다. 상처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손해였다. 집회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서부터 시작해서, 파업이 끝나고 직업인으로 돌아갔을 때 조직으로부터 내쳐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 방송을 하고 싶어서 회사에 들어온 사람들이 방송을 제대로 하려는 마음 때문에 아예 방송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치명적이고 근원적이다. 어찌어찌 이 불안을 극복한다 치자. 이 대오를 같이 이루는 사람들 간에도 작은 희생과 큰 희생의 대차대조표가 섬세하게 갈리며 서로에게 실망하고 급기야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이간질의 순간이 너무나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 가끔씩 취하게 되는 이익에도 촉각이 곤두선다.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받는다. 관계란 흐르는 것이라 파업의 시간이 10년이 쌓이며 두터워진 동료애만큼 서로가 결국은 같지 않다는 상처도 쌓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로부터 눈을 돌리면 언제나 가장 상처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 가장 큰 희생을 감내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누가 왜 새노조를 만들어 이 책임을 떠맡고 싶었을까. 남는 건 너의 상처 뿐일 것이라는 속삭임에 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옆 사람의 상처에 내가 아주 적은 양의 연고라도 되어야 할 것만 같은 연대감. 서로 어슷하게 기대어 선 모양새. 그리고 여건이 되기 전에 이미 스스로 원하는 당당한 삶을 선취한 듯 서 있겠다는 배포.


 이런 글을 내가 쓸 입장인지는 모르겠다. 남아 있었다면 부끄러움에 못 쓸 글을, 어쩌면 나왔기에 남긴다. 감사해서. 재직 기간 내내 새노조는 소속에 대한 수치심을 덜어준 고마운 조직이었다. 새노조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KBS인의 마음이 수치심으로 무너져 내렸을까. 미쳐 버렸을까. 그리고 그 절망감은 개인과 조직을 얼마나 더 부패시켰을까.


 공영방송시스템이 미래에도 유효할 것인가. 회의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KBS새노조의 파업이 뭐 그리 잘 났는가? 희생적이었는가? 감동적이었는가? 냉소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크게는 이 시스템이, 작게는 자신이 속한 구역이 헌신의 가치가 있었는지를 자조하게 되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닐까. 시스템이나 조직이 가치가 있어서 헌신할 수도 있지만, 그 가치가 땅에 떨어졌을 때 믿음을 버리지 않고 가치를 다시 세우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믿음 속에, 그렇게 서로를 향한 헌신 속에 진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이 사람들의 존재와 계승이 바로 공영방송시스템의 수명이 아닐까.


 새노조의 탄생부터 사장의 자리를 두 번 날린 파업 승리에 이르기까지의 10년은 마치 마음 속의 헌법과도 같은 것일 테다.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87민주화항쟁의 정신을 기념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헌법처럼, 이 경험을 지나온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기준은 공영방송 조직을 비롯하여 이 사회 전체의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쉽게 돌이킬 수 없는 기준선. 그 기준선을 긋는데 지난 10년간 힘을 보탠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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