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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한 가운데

네 편의 단막극

by 행복한 이민자

드라마를 단막극으로 처음 배웠다. 연수가 끝나고 드라마국으로 전입 온 후 1년 간 ‘드라마시티’의 조연출이었다. 그리고 그 1년은 ‘드라마시티’의 마지막 1년이었다. 단막극은 폐지되었고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드라마스페셜’로 옷을 갈아입었다.

귀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단막극은 당시의 내가 그릴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미래였다. 한 편 한 편에 전력을 다하는 연출 선배들을 보는 건 배움이었다. 그 과정에 드라마 연출자로서의 어떤 정수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1년에 3편의 단막을 하면서 30년이면 90편. 35년 정도 연출자로 일하면서 100편의 단막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100편을 만드는 시간은 보람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았다. 그 삶은 정갈하고 풍요로울 것 같았다. 그 생각을 당시 팀장에게도 얘기한 적이 있다. 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비아냥은 아니었다. 신입사원에 대한 약간의 어이없음과 아주 조금의 자조였달까. 띠편성으로 매주 한 편은 단막을 방송하면서 ‘TV문학관’이라는 특집성 편성까지 끼고 있던 시절의 얘기다.

입사 즈음 뭘 모를 때, ‘대강 4,5년이면 연출 데뷔를 할 수 있지 않겠어?’라고 기대했다. 8년이 걸렸다. 연출 데뷔 후엔 게걸스레 다작을 하게 될 줄 알았다. 4편. 8년에 더해 4년. 기타 다른 업무와 함께였으나, 거칠게 요약하면 1년에 자기 단막 하나씩 한 셈이다. 그 직장에서 정년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랬던 놈이 남들보다 더 빨리 나왔다. 그리고 나와서 처음 하게된 것도 단막. TV단막극이라는 목표에 사로잡혀 살아온 인생의 한 복판, 한 시절이었다.

드라마는 잊혀진다. 단막은 더 조용히 잊혀진다. 그래서 사무실 자리 한 켠에 붙여 본다. 세 편의 드라마스페셜과 한 편의 드라마스테이지. 알량한 촬영 일수를 통과했던 숱한 정념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잊혀져도, 내가 통과해온 이야기들은 나의 친우, 나의 공동체. TV시장의 한 구석 자리에 조그만 방석 하나를 깔아논 것 같은 이 구역에 나와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봐준 사람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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