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의 꿈꾸는 라디오.
방송 녹음 시간을 기다리며 혼자서 갈비탕을 먹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출연을 하러 방송국을 온 건 처음이네?
스페셜 dj 박경(블락비의 일원)의 ‘꿈꾸는 라디오’. ‘집구석 1열’이라는 새 코너에 초대를 받았다. 집에서 즐길 만한 거리를 얘기하는 코너다. 담당pd의 지인 찬스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PD연수를 같이 했던 사람이다. 섭외 전화가 왔을 때는 일단 놀랐다. 왜 내가? 프로그램을 망치려고? 그리고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다. 전체 스테프 회의, 전체 대본 리딩, 촬영... 큰 스케줄이 목전에 있었다. 하지만 30분만 와서 녹음해달라고, 섭외하기 어려운 거 잘 알지 않냐고 얘기하는데 전화로 바로 거절을 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무슨 이유에서건 섭외 거절은 서운한 구석이 있다. 내가 뭐라고 섭외를 하나, 라고 생각된다면 사실 그 반대는 더 하다. 내가 뭐라고 섭외 거절을 하나!
해보자 한 번쯤. 도와달라고 할 때 상부상조하는 거지. 도와달라는 말을 듣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사실 마음의 부담 때문이지 시간이 아예 없지는 않잖아? 한 번 환기하고 오자. 자기 소개를 하다 보면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를 언급하게 될텐데, 이렇게 한 번 공식적으로 제작 시작을 얘기해보고 싶기도 했다.
다행히 녹음 방송이다. 녹음과 생방 사이에 낀 녹음이라 딱 일만하고 가는 스케줄이었다. 방송 거리를 드라마 하나, 책 하나 정리해서 보내 주긴 했는데 간단한 리허설이 없어도 되는 걸까 약간 걱정됐다. 녹음이니까 PD가 알아서 편집해주겠지 뭐. 어라?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했다. 출연자란 좋은 거구나.
출연을 망설이는 건 내 애매한 커리어 때문이다. 연출자로서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4편의 단막극 뿐이다. 장편 참여작은 메인 연출의 입장으로 진행한 게 없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유명한 걸 언급해줘야 도움이 된다. 그러자면 프로듀서 겸 세 번째 연출자로 일했던 <태양의 후예>와 스케줄 소화를 위해 뒷부분에만 보조 연출자로 붙었던 <김비서는 왜 그럴까>등을 언급하게 될 텐데, 메인 연출작이 아니어서 자기 커리어로 얘기하기는 좀 낯부끄럽다. 그런데 언급을 안 하면 청취자에게 그나마 솔깃한 포인트를 말하지 않는 게 되니까 섭외 해준 사람들에겐 좀 매너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확 출연하자 싶었던 건 오늘 소개하기로 한 책에 쓰여있던 글 때문이었다.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저)에서 겸손도 겸손할만한 일을 하고 떨어야지 아니면 건방이라는 말이 있었다. 섭외에 지친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진의 노고를 좀 덜어주면서 간단히 내 이야기 가능하면 재미있게 하고 오자 싶은 마음이 들게 한 문구였다.
MBC 라디오 스튜디오는 KBS라디오 스튜디오와 달랐다. 엔지니어가 없는 일체형 스튜디오였다. 작가 셋, DJ, 출연자, PD까지 한 방에 옹기종기 몰려 앉는 구조였다. 중간에 유리막을 끼고 앉아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기가 편하다.
박경 씨도 오늘이 라디오 진행 이튿날이었다. 두 초보가 만난 셈이다. 정말......날 부르다니 간 큰 섭외다... 라고 생각했다. Pd와 작가들이 친근하게 이런 저런 농담을 하며 편안하게 마음을 풀어주었다. 녹음이 시작됐다. 박경 씨의 진행은 편안하고 진솔하고 귀여웠다. 무리를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을 툭툭 잘 던져주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할 때 또렷이 지그시 잘 경청해주었다. 노련한 진행자였다면 오히려 내가 긴장해서 더 버벅거렸을 것 같다. 박경 씨 덕분에 무척 편안하고 재미있게 녹음 했다.
위의 책과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 밴더스내치, 두 편을 소개했다. 최근에 본 것 들이어서.
말하다 문장이 중간중간 꼬이던데 생방에서 자기 의견과 대화를 유려하게 펼쳐내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신청곡도 두 곡 틀었다. Massive Attack의 ‘Teardrop’과 아이유의 ‘소격동’.
따지고 보면 첫 라디오 출연은 아니다. 14년 전에 대구MBC에 입사했을 때, 동기인 이민정PD와 대구지역 ‘별이 빛나는 밤에’에 나온 적이 있다. 신입PD 소개 해주는 코너에서. 그러고 보니 그 땐 생방송이었구나. 말하다 멈추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적당한 말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땐 서태지의 ‘로보트’를 신청했었다. 소속 개념 없이 나로서 출연한 건 이번이 처음이긴 하다.
주차장에 들어가면서도, 나오면서도 스스로를 ‘출연자’라고 말하면서 나와야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출연자라니. 어느 부서 직원입니다, 가 아니라. KBS를 나온 후엔 늘 왠지 조금 뿌리 없는 기분이 들곤했다. 현재 소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상해서 강한 구속력을 가진 소속을 답답해 하면서도 든든해하고,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방송국이란 묘하다. 소속되어 있을 때는 집성촌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하고 내 마을 같다. 하지만 일하다 보면 일로부터 소외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출연자로 오니 집중적으로 방송국 품에 와락 안겼다가 기약없이 다시 뱉어지는 느낌이다. 방송국이라는 곳이 새롭게 실감난다.
늘 라디오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출연의 경험을 선사해준 장수연PD에게 감사를.
1월 11일 목요일 방송. 91.9 박경의 꿈꾸는 라디오. 9시부터 11시 중 한 시간 분량을 채울 모양이다. 내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 듣는 게 제법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다. 청취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