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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 이민자 Feb 05. 2019

라디오와 위궤양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Work and Life Balance)

 건강 프로그램 얘기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생각하면 이른바 ‘워라밸’이 뛰어난 직업으로 생각하기 쉬운 라디오PD의 건강에 대한 얘기다.


 라디오PD에 대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건 아무래도 영화 ‘접속’의 한석규였던 것 같다. 낡은 LP들의 고즈넉함과 좋은 음악, 그 안에서 고독을 품고 공감을 요하는 프로그램을 발신하는 사람. 면바지와 가디건, 안경과 미소의 부드러운 사람.


 강릉방송국의 아나운서이자 PD였던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도 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시크한 패션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격렬한 연애를 병행하며 사람 속을 새까맣게 태우던 사람.


‘라디오 스타’의 최정윤도 있겠다. 진행자와의 갈등 속에서 라디오가 전하는 감동의 순간을 잡아 챘던 PD. 또는 ‘더테러라이브’에서, 보도국으로부터 라디오 스튜디오를 침탈당하는 진정한 테러(…)를 당했던 억울한 표정의 그 시사 라디오 PD도 있네… 이 분은 워라밸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고.


 가장 최근에 대중의 마음 속에 스며들었던 라디오 찬가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나왔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 중에 부른 노래 ‘Radio Gaga’. ‘십대의 밤을 같이 통과해온 유일한 친구, 힘이 있었고 좋은 날들이 있었지만, 아직 최고의 시간은 오지 않았어!’ 이 노래를 들으며 라디오PD가 직업인 동거인 C의 손을 맞잡고 줄줄 울었다. 라디오란 그런 심쿵한 매체였기에. 아직도, 그런 매체이기에.


 아내 C를 통해 본 라디오PD의 워라밸은 결코 속 편히 찬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라디오PD의 삶을 지배하는 건 무시무시한 끝 없는 일상성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매일 방송이 나간다. 주5일제라고는 하지만 주 7일 방송을 책임져야 한다. 휴가를 가도 마찬가지다. 명절 연휴도 마찬가지다. 주 7일 방송을 책임지는 전제 조건에 모든 삶이 따라간다. 이건 끝 없는 시지푸스의 노역과도 같아서, 매일 떨어지는 돌덩이를 산 정상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미리 며칠 분을 올려 놓을 일도 생긴다. 어쨌든 올려야 할 돌의 개수는 결코 변하지 않고 매일 꼬박꼬박 하나씩 쌓인다.


 여기에 경쟁도 붙는다. 청취율 조사 기간에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적은 예산 속에서 조금이라도 다양성과 재미를 뽑아내려고 발버둥을 친다. 특히 예능성 프로그램들은 더 하다. 전체 국민을 단일 평가 체계에서 한 줄로 세우는 입시 경쟁 시스템을 가진 나라답게, 경쟁에서의 승리로부터 얻을 게 크건 작건 간에, 경쟁에 임하는 사람들의 비장함과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냉정함은 사회의 어떤 단위에서도 비슷비슷한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론 라디오 청취율 조사라는 게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는지, 또 얼마나 라디오 프로그램의 성취를 반영하는지 의문이 있다. 이는 TV시청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쨌든 수치로 뽑혀나오는 단일 평가 체제라는 이유 때문에 이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다.


 아내가 맡은 프로는 정오 프로그램이다. 대체로 재미있게, 때로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며 프로그램을 끌어온 지 10개월 여만에 도대체 음식을 위에 넣기 힘든 심한 복통과 역류성 식도염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 치통까지 덤으로. 정오부터 두 시간을 하는 프로그램에는 점심을 먹을 타이밍이 없다. 프로그램 전에는 생방을 준비하거나 녹음을 한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회의나 또 녹음을 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간단히 김밥이나 빵 류로 허기를 달래다 보니 씹지 않고 대충 삼키는 일이 비일비재. 다같이 점심을 먹자면 오후 2, 3시를 넘기는 일도 비일비재. 다른 팀원들도 고통이지만, 돌아가며 잠시 요기를 할 때가 생겨도 생방송 책임자로서 그 로테이션에 끼기도 어렵다. 혼자 지고가야할 리더의 스트레스는 덤.


 그런데 정오방송만 그런 건 아니다. 밤 열시 방송을 할 때는 자정에 방송을 끝내고 아무리 빨리 퇴근하고 잠을 청하려 해도 생방의 기운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새벽녘에 잠이 들고 아침을 못 먹었다. 아이 얼굴을 못 보는 고통은 덤. 맡게 되는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대에 따라 일상이 완벽하게 지배된다. 라디오PD 동거인의 일상도 얼추 그렇게 따라간다. 이런 일상이 ‘쇠도 씹어먹을 청춘’이 지나서까지 계속되니 결국 몸에서 고장 신호를 보낼 수밖에. 최근에는 복통과 함께 무섭게 살이 빠졌다. 우아하고 좋아 보이는 라디오PD라는 직업의 현실.


 라디오PD는 워라밸을 보장하는 직업이 아니라, 이 악물고 노력해서 최소한의 워라밸을 스스로 유지해야만 지속할 수 있는 직업에 가깝다. 드라마 쪽은 사람들이 힘들 거라고 지레짐작으로 이해해주는 맛이라도 있다. 그리고 심적 부담이 있어서 그렇지 비시즌 기에는 매우 여유 있다. 맺고 끊는 게 있으면 달릴 때 달릴 수 있다. 라디오는 무섭게 부딪쳐오는 일상을 계속 받아쳐내야 한다. 아내는 위장 복원과 치통 치료의 대장정에 나섰다. 집에 의료 서적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러 병원을 다니고 인터넷 카페에서 정보를 찾아본다. 한번 고장난 몸은 빨리 고쳐지지 않는다. 이제 원하는 때에 원하는 음식을 시시덕거리며 같이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더 이상 낭비할 건강이 없다. 주섬주섬 몸이란 기계에 기름 쳐가며 원하던 일과 삶을 균형 맞춰 운영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건강 과소비의 나날들이여 영원히 안녕. 힘을 내요 라디오PD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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