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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아저씨 Jan 15. 2020

어머니에 대한 단상(斷想)

엄마는 늘 옳다.......



어머니의 비양심


지금까지  생활을 되짚어 보면 일단 겉으로 봤을 때 대부분 양심적으로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상은 남이 보지 않을 때나 혼자 있을 때는 슬며시 쓰레기를 버리기나, 문방구나 가게에서 잡화 훔치기, 어린 시절 땅콩 서리, 몰래 담배 피우기 등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을 한 기억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득 어머님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머님이 양심에 거리낄만한 일들을 한 기억이 전혀 떠 오르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일이나, 가족들이 잘못한 일들을 나무라는 모습만 떠오를 뿐 어머님 스스로  잘못한 일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어쩌면 신기(예수님이나 부처님도 아닌데....)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어머님도 사람인 이상 무언가 분명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겠지만

적어도 자식들 앞에서만은 늘 바른 모습만 보이기 위해 노력하신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인 걸로 기억이 나는데, 어머님께서 철부지 아들의 군것질을 위해 딱 한번 양심의 눈을 감은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날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형편이 조금 어려워 꼭 필요한 것 외에는 허튼 곳에 한 푼의 돈도 쓸 형편이  안되었다.      


운동회 날이라고 특별한 예외가 없었다.

어머님께서 정성스럽게 싸오신 점심 도시락과 약간의 간식이 먹거리의 전부였었다.      


그렇지만 운동회 행사에는 의례히 길거리 행상들이 붐비기 마련이었다.

솜사탕, 냉차, 쫀득이, 뽑기, 어묵 등 평상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군것질거리들이 학교 안팎에서 아이들의 입과 눈, 그리고 코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머님께 사 달라고 나름대로 칭얼거리기도 해 보았지만 전혀 통하지를 않아 풀이 죽어 있었다.

그때 운동장에 떨어져 있는 오십 원짜리 동전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오십 원이 큰돈은 아니었지만,

길거리 행상에서 파는 군것질 거리 두 세 게는 사 먹을 수 있었다.

난 어머님께 동전이 떨어진 것을 보여드리고는 주워서 가지겠다는 것을 말없이 눈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길거리에 떨어진 것은 당연히 주워서 파출소나 선생님께 갖다 드리고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주워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지만 동전을 주울 때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니의 묵인하에 그 돈으로 솜사탕과 어묵을 사 먹으며 철없이 즐거워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것이 아마 내가 기억하는 한 어머님께서 양심을 잠시 동안 묻어 둔 단 한 가지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어머님은 늘 자식 앞에서는 바른 사람이시고 성인군자이시다.





어머니의 배웅과 음성편지   

  

건설회사에 처음 입사 후 사우디 부임을 명 받았을 때다.


병역특례로 입사를 했기에 2년 이상 해외근무를 해야 했다.

 

1986년 10월 중순에 사우디로 출국을 했었다.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 출국 전 이틀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국내의 주변 일과 짐들을 정리하고 고향에 가서 친지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시간조차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명령서를 받은 즉시 안동에 내려가 대충 짐을 꾸리고 가족들과 아쉬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안동역(요즈음 유명한 트롯가요 제목 - 안동역에서)으로 기차를 타려고 가는데 어머님이 아쉬운 듯, 계속 나를 따라오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 그것도 열사의 나라 중동에 가는 나의 심정도 여러모로 착잡했지만 어머님의 심정은 더할 나위 없이 아프셨을 것이다.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시라고 짜증을 냈지만 어머니는 먼발치에서 계속 따라오셨고, 계속된 나의 성화에 역 주변 전봇대 뒤에서 사우디를 향해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안타까운 듯이 가만히 지켜보셨다.


곁 눈길로 어머님의 모습을 보며, 괜스레 가슴이 울컥해지면서 나도 몰래 하염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어머님의 안타까운 배웅을 뒤로하고 도착한 사우디에서 2년간 근무하는 동안,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어머니의 “ㅇㅇ야 잘 있나? 얼매나 고생이 많노!”로 시작되는 음성편지다.


편지를 쓸 만큼 한글 쓰기가 안되셔서 - 어머님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 한글을 잘 모르셔서, 동사무소에서 한글 문맹자에게 실시한 약 한 달간의 한글교육만을 받으셨다. - 가족들이 어머니의 음성을 테이프에 녹음한 것이었다.


그것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마음이 짠하면서도 감동적인 어머님의 음성편지였다.


음성편지를 듣는 내내 반가운 마음에 앞서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도 많이 훔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수없이 반복해서 듣기도 했었다.


지금은 몸이 불편하셔서 2009년 이래로 요양병원에 벌써 11년째 입원하고 계신 어머니!


그래도 가족들을 알아보고 정신이 있으실 때는 뵐 때마다 늘 똑같은 어머님의 자식에 대한 괜한 걱정에 더러 짜증도 내고 돌아서 온다.

그것이 바로 모든 어머님과 자식과의 관계,

- 늘 좋은 마음으로 만나지만 돌아갈 땐 짠한 마음으로 싫은 소리 하면서 헤어지는 관계 - 인 것 같다.


이제는 가족의 얼굴을 거의 기억 못 하시는 상태이시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늘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은 아직도 한결같은 것이 놀랍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어머니 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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