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횟수가 건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를 보면 젊었을 때보다는 50대 중, 후반인 지금 꿈을 꾸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꿈은 미래의 일들을 암시하는 메시지라는 믿음이 있어, 과거는 물론 현재도 해몽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원시 토속신앙이나 무속신앙이 고도로 발달했던 고대시대에는 꿈을 해석하는 점쟁이나 예언자는 지배적 계급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었다.
각설하고, 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수면 중에 꿈을 꾸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가끔씩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야,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제 살았구나" 하면서 식은땀을 닦아 내곤 했다.
사람들이 좋은 꿈을 꿀 때도 있고 나쁜 꿈을 꾸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좋은 꿈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그렇지만나쁜 꿈은 오래도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잊을만하면 다시 같은 꿈을 반복해 꾸곤 해서 괜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여러 가지 나쁜 꿈들이 많이 있지만 나에게는 늘 현실인 것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잊히지 않는 세 가지 꿈이 있다.
첫째는, 대학 졸업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제때 졸업이 안 되는 꿈이다.
단순한 학점 계산의 실수이거나, 특정 과목의 이수 실패(마지막 학기 F학점)로 인하여 학부 졸업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그 해에 졸업을 못하게 된 것이다.
긴 인생에 있어서 한 순간의 실수로 한 학기나 일 년을 대학에 더 다니면 해결되는 것 아니냐고 쉽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엔 그 당시에 내가 잃어야 될 것이 너무 많았다.
특례보충역으로로 기업체에 취업을 해서 군대를 면제받아야 하는데 취업은 고사하고 당장 군대에 가야 하고,
대학 4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준 형님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지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단순히 몇 학점을 따기 위해 일 년을 학교에 더 다녀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에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사실은 4학년 때 건축 졸업작품전 준비를 핑계로 인문학 한 과목의 수업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겨우 D 마이너스 학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학점 수료에 대한 걱정이 시간이 흐른 후에도 꿈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정말 다시는 꾸지 말아야 할 악몽의 일 순위로 생각되는 꿈이다.
둘째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중동 파견근무를 명 받는 꿈이다.
86년도 건설회사에 입사 후 10월부터 사우디 리야드 현장에서 2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중동지역 건설붐이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중동에 진출해 있던 건설사들이 한국으로 많이 철수를 하던 시기였다.
많은 인원과 장비가 한꺼번에 국내로 들어오면서 건설사 직원들의 정리해고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었고, 건설사 직원들의 실직이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다 보니, 현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처우도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실정이었다.
급여 삭감, 근무기간 중 휴가 횟수 조정, 현장 지원비 및 부식비 삭감, 근무시간 연장 등 70년대 중반 중동 건설붐 초기와 비교해 직원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근로의욕이 최하로 저하되었던 시기였다.
다행히 국내에서는 80년대 후반 아파트 가격 폭등을 막기 위해 5대 신도시(분당, 일산, 평촌, 중동, 산본) 개발을 시작함으로써 중동에서 복귀한 건설기술자들이 국내에서 대부분 일자리를 되찾았으나, 해외건설의 경우는 그 이후로도 오랜 기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해 해외근무 직원들의 근무여건은 갈수록 악화되었었다.
건설인으로서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외근무를 해야겠지만, 국내에서 생활을 하는 경우와 대비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해외, 특히 중동 생활이다.
가족과의 이별, 국내 정보로부터 소외(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공유화가 즉시 가능하지만, 팩스에만 의존하던 당시에는 국내 소식이 거의 전무한 실정)로 인한 기회 상실, 현장 외부 출입 제한 등 모든 생활들은 현장 울타리 내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장 기본 근무시간이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여서 사실상 일과 업무를 제외한 과외 생활은 거의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미혼자의 경우에 결혼문제까지 고려하면 모든 여건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어느 날 갑자기 중동 근무를 하라는 꿈을 꿀 때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갖곤 한다.
셋째는, 나이 마흔여덟 시절을 지나서 꾸었던 것인데, 문득 노총각(?)으로 혼자 살고 있는 꿈이다.
이만한 나이에 나와 결혼을 해줄 여자는 있는지?
결혼을 해야 한다면 지금에 와서 2세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 건지?
친구 부부들과의 모임에서 늘 구박덩이로 있는 모습 등.
모든 생활이 엉망인 채로 뒤죽박죽 되어버린 나 자신을 바라보며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다가,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옆자리에 누워 얌전히(?) 잠자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곤 했다.
"간섭받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최고",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혹자들은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아내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늘 보이지 않게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참새 가족
단지 꿈을 꾸었을 뿐이고, 앞으로도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지만 아직도 위의 세 가지 악몽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