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며칠 전 아내와 같이 간절기 봄 겉옷을 구입했다.
집에서 입어보니 역시나 소매가 조금 길게 느껴졌다.
ㆍ나 : 어? 이 옷도 소매가 기네!!
요즘 옷들은 다 소매가 긴가 봐!
긴소매 쪽을 두 단 접어 달라며 아내에게 팔을 쭈욱 내밀었다.
ㆍ아내 : 당신 팔이 짧아서 그래~~.
내민 옷소매를 접으며 아내가 한마디를 무심하게 툭 던진다.
한국 남자들의 표준 팔길이가 얼마인지? 그리고 내 팔길이는 얼마인지?를 자로 재어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내는 내 팔길이가 짧다는 것을 알까?
나도 모르는 사실을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가?
예전부터 기성복을 사면 거의 소매를 조금씩 줄이고 티셔츠나 점퍼를 사면 늘 소매 끝 한두 단을 접어서 입었다.
옷소매가 손등을 덮는 것이 싫고 답답해 보여 접고 입었지만 팔이 짧아서 그렇다는 것은 오늘에서야 처음 들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팔을 쭉 펴보니 왠지 짧은 느낌도 들고 그날따라 손가락도 뭉툭하게 짧아 보였다.
확인할 방법은 마땅하게 없지만 아내가 말하면 요즘은 그것이 진실(?)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김없이 내게 진실을 말해 버리는 아내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나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이기에 고맙기도 하다.
[# 2.]
작년 9월 말부터 인터넷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디지털피아노에 관심을 보이자 아내가 즉시 인터넷으로 구입, 배송을 시켜 줬다.
왕초보에서부터 시작해 5개월이 지난 지금 간신히 초중급 편을 연습하고 있다.
4월 중순경 독일과 인근 나라 여행을 할 예정인데 아내가 공원에 피아노가 있는 곳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국 땅 한적한 공원에서 피아노를 치는 중년 남자"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여행지 공원에서 연주하기 위해 3곡 정도 연습하기로 했다.
물론 아주 쉬운 곡으로~~.
며칠 후 아내에게 준비한 세곡을 들려주었다.
리듬이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듣기는 좀 어색했지만 더 연습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내의 평가는 어떤지?
은근히 기대를 하며 물었다.
ㆍ나 : 여보~~, 어때?
라는 나의 물음에 아내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ㆍ아내 : 어떤 곡을 친 거야?
연주 전에 미리 곡명 세 개를 알려 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조차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뿔싸!
피아노 연주를 향한 나의 갈 길이 아직 멀었나 보다"라는 현타가 왔다.
[# 3.]
3년 전 오른쪽 발목 골절상을 겪었다.
깁스와 목발을 하고 절뚝거리며 다니다 4개월이 지난 후 재활운동을 시작했다.
무리한 야외운동보다는 가볍게 실내에서 춤을 배우는 것으로 재활운동을 대신하기로 했다.
선택한 춤 종목은 셔플댄스.
중국에서 광장무로 많이 하는 춤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편안하게 추는 댄스였다.
인터넷에 셔플댄스 강의 동영상을 여러 개 본 후 "춤선생 ㅇㅇ "강좌를 선택했다.
기본스텝과 응용스텝 그리고 셔플로 계단 오르내리기가 나의 최종 목표였다.
세종시 오피스텔에서 혼자 숙소생활을 할 때라 퇴근 후 숙소에서 운동 겸해서 동영상을 보며 셔플댄스 스텝을 따라 했다.
기본스텝이 조금 익숙해지자 오피스텔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어 계단 오르내리기 연습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셔플 스텝이 어느 정도 몸에 익을 무렵
희망사항이 하나 생겼다.
밤에 야광 신발을 신고 셔플 댄스 추기.
어두운 밤,
야광신발을 신고 셔플댄스를 추는 동영상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TV를 보다가 가끔 가수들의 몸동작을 따라 해 보지만 아내는 나의 춤솜씨를 늘 만족해하지 않는다.
왠지 어색하고 그 안무만의 핵심포인트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몸치?
예전부터 춤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 아내는 방송용 댄스 교습을 여러 번 권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때 배웠으면 좀 나아졌을까?라는 궁금증은 있지만 이제는 아마추어로서 자기만족하며 살기로 했다.
요즘도 운동을 하기 전 몸을 풀 겸 가볍게 셔플스텝을 밟아 보곤 한다.
때가 되면 아내에게 야광 셔플 댄스화를 사 달라고 해야겠다.
멋진 야간 동영상 촬영을 위해~~~.
[# 4.]
훌륭한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
공간과 비례감각 그리고 그림 그리기.
사람들이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리듬이나 선율로 나타내는 것이 음악이고 몸동작으로 표현하면 춤이 된다.
글로 쓰면 문학이 되고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미술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느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 아닌가 싶다.
건축을 흔히 총체적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건축물은 공간적 비례와 미술적 감각 그리고 음향적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삼차원 공간의 예술작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간이나 미적감각은 기본이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
건물마다 쓰임새가 다르고 건축주들의 성향이 상이하다 보니 설계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관련자들과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건물용도에 대한 사전 지식은 기본이고 내부공간과 외부 디자인을 스케치를 통해 지속적으로 형태를 잡아가며 건축주와 협의를 진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건축가는 어느 정도 그림실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내가 건축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접은 이유도 바로 극복할 수 없는 그림실력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도저히 따라잡을 수없었던 것이 미술 실기과목이었다.
미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지만 같은 조건에서 친구들에게 매번 뒤처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건축가를 포기하고 건설회사를 택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건설에서도 미술실력이 필요할 때가 많았다.
건설현장에서 의사소통법은 바로 도면과 간단한 스케치였다.
수백 마디 말보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의사전달 방법이었다.
부족한 그림실력을 아쉬워하며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아내가 또 결단을 내렸다.
ㆍ아내 曰 : 여보, 미술학원에 상담하러 갑시다!!
다음날 유치원생이었던 딸이 다니는 미술학원으로 나를 끌고 갔다.
원장님과의 면담 끝에 홍익대 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에게 개인지도를 받게 되었다.
두툼한 스케치북을 준비해 연필로 선긋기부터 시작했다.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씩 수개월동안 교습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데생과 풍경스케치 그리고 기본 색연필 채색단계를 배우다가 사정이 생겨 그만두게 되었다.
좀 더 배웠으면 나아지긴 했겠지만 아마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그 이후 여러 번 이사를 다니다 보니 연습한 스케치북이 사라져 버렸다"
"유명화가들은 습작도 비싸게 팔리던데~~"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미술작품집을 소중히 보관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유명화가가 될 확률이 제로이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술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가볍게 시도해 본 것들이 꽤 된다.
노래와 춤도 해보고, 몇 가지 악기도 연주해 봤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수준까지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 이후 악기나 춤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아내는 뭐든 제대로 배워보라며 내게 채찍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고급 하모니카와 리코더를 생일선물로 받기도 했었다.
또 책을 사서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해 보지만 나 홀로 배움에는 늘 한계가 있어 꾸준히 이어가지 못했다.
동시에 여러 가지를 병행하는 능력이 내게 부족한 걸까?
예술을 향한 나의 욕구를 위해 여전히
물심양면으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아내를 생각하며 오늘은 피아노 건반을 열심히 두드려 본다.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아내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게 될 그날을 기약하며 이젠 더 좋은 디지털 피아노를 사 달라고 해야겠다.